엄마, 밥!
주기도문을 ‘위대한 신에게 드리는 형식적이고 딱딱한 공동기도문’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곳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는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입니다. 초월적인 신과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밥’이 화제가 튀어나옵니다. 우리나라 말로 ‘양식’으로 점잖게 번역을 했지만, 영어로는 빵(bread)이고 헬라어 원문으로도 아르톤(ἄρτον)이라고 빵의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가 사탄에게 시험받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때 사탄이 예수에게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때, ‘떡덩이’로 사용된 단어가 바로 아르톤(ἄρτον)입니다. 새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고 바꿨더군요. 빵이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따라서 ‘일용할 양식’을 우리나라 문화를 고려해서 번역한다면 ‘오늘 먹을 밥’이 훨씬 더 정확합니다.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던 기도가 갑자기 땅으로 훅 떨어지는 느낌이지 않나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언급하면서 추상적이고 고상하게 진행되던 기도 중에 갑자기 밥을 달라는 기도가 좀 생뚱맞죠? 예수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던 중에 갑자기 허기를 느낀 것일까요?
이 부분을 통해서도 우리는 주기도문이 사랑하는 우리 아빠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기도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부담없이 “밥 차려 주세요”, 혹은 “밥 사 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주 친한 사람에게도 밥 달라고 요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죠.
“엄마, 밥!”
그러면 엄마는 당장에 반응을 합니다.
땅과 밥, 그리고 용서
밥을 달라는 기도는 아빠에게 친근하게 요구하는 기도라고 그 요구 자체는 이해할 수 있어도 사실 이 기도의 앞부분을 생각하면 기도의 흐름이 갑자기 끊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이 기도의 앞 문장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의 두 문장 사이의 의미의 간격이 매우 크죠? 하지만, 단어만 놓고 보면 앞문장과 뒷문장이 연결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원어로 보면 앞문장의 마지막 단어는 땅(earth, γῆς)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의 첫 번째 단어는 정관사를 빼면 빵(bread, ἄρτον)입니다. 땅과 빵, 혹은 땅과 밥은 잘 어울리는 단어죠. 여기서 단어에 대한 지나친 관심보다는 어떻게 의미가 이어지고 있는가 살펴봅시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일까요? 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면 그냥 밥이 아니죠. 내가 먹을 식량을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먹고 오늘을 살아갈 밥, ‘우리의 밥’을 위해 간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한 첫 번째 구체적인 조건을 언급하며 이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간단히 말하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 혹은 내가 다른 누군가와 교제함으로써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 무엇일까요? 밥입니다. 함께 밥을 먹는 것입니다. 사람이 타인과 친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함께 밥을 먹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났다가 헤어질 때 인사치레로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 언제 밥 한 번 먹자.” 이 말의 의미는 ‘우리 친하게 지내 보자’ 혹은 ‘우리 서로 교제함으로써 공동체를 만들어 보자’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는 이런 식으로 앞부분과 이어지고요. 또한, 뒷부분과도 연결됩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 두 가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공동체는 깨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죠. 하나는 밥이고 다른 하나는 용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의 다음 부분이 용서를 언급하고 있죠. 어떻게 보면 밥은 당연한 조건입니다. 밥을 먹어야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함께 먹을 밥이 충분히 있어야 우리는 서로 싸우지 않고 지낼 수 있습니다. 공동체 유지의 다른 하나의 조건은 ‘용서’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생활하다 보면 늘 갈등이 발생하고 다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아무런 잘못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서로 간에 충돌이 생겼을 때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는 금방 깨집니다.
‘내’ 밥이 아닌 ‘우리의’ 밥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를 공동체가 아닌 양식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가 전한 메시지와 심각하게 충돌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예수가 산에서 설교한 산상수훈의 메시지가 나오는데요. 주기도문은 그 중의 한 부분이죠.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6장 11절에 나옵니다. 주기도문에 버금갈 만큼이나 유명한 구절이 산상수훈에 여러 구절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6장 33절입니다. 이 구절은 주기도문이 나온 본문과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외우고 계신 분도 많을 겁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구절의 앞부분에 이렇게 나와 있죠.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1] 이 구절은 먹을 음식, 입을 옷, 살 집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죠. 예수가 제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종이 삼고 바다를 잉크 삼아 그 사랑을 적어도 다 못 적는다고 찬송가를 부르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가 양식을 달라고 기도해야 양식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밥 사 주고 “이거 내가 쏘는 거야”라고 생색내는 분도 아닙니다. 혹은 하나님은 “내가 밥 안 주면 너네 다 죽는다” 이런 식의 협박을 하는 분도 아니시죠. 우리가 말을 잘 들으면 태양을 켰다가 말을 잘 안 들으면 태양을 끄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말라서 죽겠다고 아우성치면 비를 내려 주고 그렇지 않으면 무관심한 분이 아니죠. 마치 연금대상자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매달 같은 날에 통장에 연금을 넣는 국민연금시스템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놓으셨죠. 심지어는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시스템은 정상 작동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 믿고 나쁜 짓을 하는 악인들이 더 잘 먹고 잘 사는 이상한 현상도 발생하죠. 여하튼 하나님은 그렇게 통 큰 대인배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저도 두 아이의 아빠인데요. 제가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아이들은 제가 밥을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거나 밥을 달라고 요청을 해야 밥을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때가 되면 알아서 밥을 주겠지’라고 생각하죠. 밥 못 먹을까봐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의 포인트는 ‘우리의 밥’입니다. 내 밥이 아니라 우리의 밥입니다. 내가 먹고 살 것을 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 내가 책임지고 있는 공동체에 먹고 살 양식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의 밥’은 ‘어제 우리의 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우리’는 ‘어제의 우리’와 다를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 우리의 식구는 어제의 식구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 어떤 밥을 먹을 것인가’와 ‘내가 오늘 누구와 공동체를 이루어 그와 함께 더불어 밥을 먹을 것인가’는 완전히 다른 관심 사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는 사랑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공짜 점심은 있다
요새는 사람들이 혼자 밥 먹는 것에 대해 많이 꺼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혼자 밥 먹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죠. 특별히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공짜로 밥을 대접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살아갈 사람을 찾는 것이 주기도문을 기도하는 사람의 삶의 자세입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원리는 경제적 관점에서는 진리임에 분명하죠. 이 말은 우리가 누리는 모든 혜택에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거나 아니면 그에 대한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원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공짜밥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우리에게 아침, 점심, 저녁에 공짜로 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공짜로 밥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지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세요. “누가 나에게 공짜밥을 가장 많이 주었나?” 누가 떠오르나요? 그 사람이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가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거기에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이 소문이 퍼지니, 무리가 여러 동네에서 몰려 나와서, 걸어서 예수를 따라왔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외에, 어른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
(마 14:13-21, 새번역)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예수가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오늘 우리가 함께 먹을 빵과 물고기를 주십시오.”
이 기적의 요점은 빵과 물고기가 신기하게 불어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학자는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지고 온 음식을 서로 나눠 먹을 수 있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랬을 수도 있죠. 저는 예수가 빵이나 물고기의 양을 불리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물 위를 걷기도 했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그는 부활하셨으니까요. 빵이나 물고기의 양을 부풀리는 것은 대단한 기적에 끼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기적은 빵이나 물고기가 불어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의 기적은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함께 한 식구, 한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의 기도는 이런 의미의 기도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확장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우리의 밥’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입니다.
[1] 마태복음 6:31-32, 개정
[2] 마태복음 6:26,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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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메 티소 (James Tissot, 프랑스 1836-1902), 오병이어의 기적 (La multiplicité des pains)
이 그림에서 예수는 누구인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한참을 찾아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른쪽 위에 흰 옷을 입는 작은 사람 보이시죠? 그 사람이 바로 예수입니다. 이 그림의 작가인 자메 티소가 강조하는 있는 점은 ‘모두가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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