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시작이 전부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구체적인 기도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실 대상을 호출하는 부름이죠. 하지만, 이 부름 안에는 주기도문의 모든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약 주기도문을 끝까지 할 시간이 없다면,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기만 해도 주기도문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내용과 느낌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아무래도 주기도문의 원문을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별히 주기도문의 시작 부분은 더 정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의 첫 번째 단어가 주기도문의 전체 분위기를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의 원문은 ‘하늘’이 아닌 ‘아빠’로 시작합니다.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쓰여 있기 때문에 시작하는 단어를 아빠가 아닌 아버지(Πάτερ)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수가 제자들과 사용했던 단어는 헬라어가 아니라 아람어였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가르쳐 준 주기도문도 헬라어가 아닌 아람어였겠죠. 주기도문 전체를 아람어로 정확하게 되살리는 것은 어려울 수 있겠지만, 성서학자들은 주기도문의 첫 번째 단어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1] 주기도문의 첫 번째 단어는 ‘아바(abba)’입니다. 아바는 이스라엘에서 어린 아이가 아빠를 부르는 말로 아이가 가장 먼저 배우는 말 중에 하나였다고 하네요. 따라서 아바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버지보다는 아빠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신약성서는 헬라어로 쓰였기 때문에 예수가 사용했던 아람어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바(abba)라는 아람어는 몇 군데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예수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던 것이 매우 인상적으로 제자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겠죠. 아빠를 뜻하는 아람어 아바(abba)는 신약 성서에서 마가복음 14:36, 로마서 8:15, 갈라디아서 4:6, 이렇게 세 번 등장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모두 아바(abba)를 아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에는 아빠를 뜻하는 아람어가 남아 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주기도문이 아바(abba)로 시작한다는 데에 별다른 이견을 달지 않습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가복음 14:36, 개정)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15, 개정)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6, 개정)
‘아빠’라는 단어는 주기도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누군가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은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나타내는 말입니다. 기도할 때 ‘존귀하신 하나님’,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과 같은 말로 시작하는 기도와 ‘아빠’라고 부르며 시작하는 기도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죠. ‘아빠’라고 부르며 시작하는 주기도문은 아이가 아빠에게 다가서면서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두려움의 기도가 아닌 친근함의 기도이며, 형식적인 아버님 전상서가 아닌 이모티콘 가득한 문자메시지에 가깝습니다.
엄마가 아닌 아빠
그런데, 하나님을 엄마가 아니고 아빠로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아빠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엄마라고 칭했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엄마로 불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생물학적으로 남성에 더 가까워서 그런 것도 아니고, 부성애가 모성애보다 더 탁월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남성이 여성보다 더 우월해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세심하고도 인내심 있는 사랑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하나님을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킨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문화 속에서 아버지는 친근한 사랑의 대상이 아닌 거역할 수 없는 권력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차라리 하나님을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하나님을 엄마로 부른다면 예수의 아빠인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성격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하나님을 엄마나 어머니로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도 하나님께서 알아 들으실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받았는데 그 권리를 당연히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1] Kenneth E. Bailey, Jesus Through Middle Eastern Eyes: Cultural Studies in the Gospels (Downers Grove, Ill: IVP Academic, 2008),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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