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잠깐 우리가 자주 쓰는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죠.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약성서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소속 중국 선교사인 존 로스(John Ross)가 주도하여 번역해서 1887년에 나온 “예수셩교젼셔”입니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신의 명칭인 ‘하나님’은 로스번역팀이 번역한 것입니다. 예수셩교젼서에는 신이 ‘하나님’으로 번역되었지만 1882년에 누가복음에서 로스번역팀은 ‘하느님’으로 표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님(heaven+lord)’으로 원래 형태는 ‘하ㄴ(아래아)ㄹ님’이었습니다. ‘하ㄴ(아래아)ㄹ님’이 ‘하ㄴ(아래아)님’으로 그리고 다시 ‘하느님’으로 변형되어서 누가복음에 사용되었다가 1887년 예수셩교젼서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어서 표기되었습니다. 이는 로스번역팀의 한국인 청년들이 평안도 의주 출신이라서 ‘아래‘ 아’를 ‘아’로 발음하는 습관 때문에 편의상 ‘하나님’으로 바꾼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신을 표기할 때 우리나라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으로, 개신교에서 하나님으로 표기하는데 사실 두 단어는 모두 같은 말인 것이죠. 그래서 1977년에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성경을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를 펴냈는데요. 여기서 신의 명칭을 하느님으로 통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개신교에서 신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고수하여서 공동번역 성서는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유일한 신, 단 한 분뿐인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서 ‘하나’는 ‘숫자 하나’가 아닌 ‘하늘’을 의미합니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높으신 분’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오직 유일하고 한 분뿐인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매우 이해하기 어렵고 수학적 논리로는 모순입니다. [2] 수학적으로 셋은 셋이고 하나는 하나죠.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는 논리적 설명은 불가능하고 역사적, 경험적 설명만이 가능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예수의 신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교리가 만들어졌고요. 경험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이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역사적 서술도 사실은 기독교 안에서 인간의 신 경험을 어려운 말로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볼 때 삼위일체는 경험적 교리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겠네요.
삼위일체 교리는 숫자를 강조하면 안 됩니다.. 즉, 셋이나 하나라는 숫자에 빠지면 이 교리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자꾸 교리라고 하니까 사실 멀게 느껴지는데요. 삼위일체는 그리스도인의 ‘신 경험’을 나타내는 사자성어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삼위일체에서 셋을 강조하면 신이 세 분이라는 논리에 빠지고 하나를 강조하면 유일신론에 빠집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글이나 책을 읽어 보시면 굉장히 복잡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논리적 모순이 확실한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니 이상한 논리를 가져다 덕지덕지 붙여야 합니다. 논리적 모순이 있는 단어나 진술이 모두 거짓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부부는 일심동체다’라는 말이 있죠. 부부는 일심도 아니고 동체도 아닙니다. 이 말을 ‘둘은 하나다’라는 의미로 보면 논리적 모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적으로 부부가 일심동체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경험적 진술인 것이죠. 삼위일체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에서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삼위일체의 중심은 관계입니다. [3] 관계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는데요. 삼위일체 안의 관계는 한 마디로 하면 ‘사랑의 관계’입니다. 교회에 가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어구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이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신 경험에 대한 진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문장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문장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전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의미하고, 후자는 하나님을 설명할 때 사랑의 관계가 필수적 요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뺀 독자적인 유일한 한 분 하나님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말에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에서 성부, 성자, 성령은 동등한 지위를 가집니다. 성부 하나님이 맨 꼭대기에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지배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삼위일체에서 사랑의 관계는 상명하복의 관계와는 극과 극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왕으로서 백성을 사랑하듯이, 혹은 장수가 병사를 사랑하듯이 사랑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말은 아빠가 딸을 사랑하듯, 아들이 엄마를 사랑하듯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겠죠.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사랑의 관계를 맺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런 사랑의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자로서 하나님의 역할은 없습니까? 심판자 하나님이 없다면 사람들이 아무런 규율 없이 자기 멋대로 방종하면서 살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요?” 저는 이분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사람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으면 무조건 타락할까요? 엄마, 아빠로부터 충분히 사랑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잘못된 길로 빠질까요? 잘못하면 엄마, 아빠가 나를 때릴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는 어린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입니까? 엄마, 아빠를 사랑하되 두려움을 가지고 사랑하는 아이는 정상일까요?” 사랑은 사람을 망치지 않습니다. 사랑받은 사람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실상 우리나라의 많은 기독교인이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일신 신앙을 가져도 좋습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니까요. 그러나, 유일신 신앙은 기독교 신앙은 아닙니다. 우리가 유일신론에 빠지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유일한 한 분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에서 ‘하나’는 숫자 하나가 아닙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높은 분으로 이해하기는 하되 하늘을 위계질서의 꼭대기 상층부로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하늘은 물리적 공간으로 위에 있는 하늘이 아닌 초월적 공간을 의미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아버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빠입니다. 주기도문은 아이가 아빠의 눈을 바라보고 아빠의 손을 잡고 아빠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아빠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제대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할 때 아빠와 함께 걷고 있는 느낌입니까? 그렇다면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까? 그렇다면 가장 강력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라는 단어 생성 과정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책을 참고하였습니다. 맥신 클락 비치, 성서 기원과 형성, trans 서기종 (뉴욕: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 여성국, 1998), 98–100.
[2] 거스리(Guthrie)는 삼위일체는 논리적으로 풀어야 할 수학문제가 아니라 고백되어야 할 신비라고 정리합니다. 다음을 참고하세요. Shirley Guthrie, Christian Doctrine, Revised, Subsequent edition (Louisville, Ke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95.
[3]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핵심단어는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입니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회전’이며 ‘둥글게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어떤 학자는 페리코레시스를 성부, 성자, 성령이 둥글게 돌아가며 춤을 추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나라식으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강강술래를 도는 것처럼 둥글게 돌아가면서 서로 동등한 관계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모양을 묘사한 말입니다.
'주기도문으로 응답하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기도문] 1_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0) | 2019.03.04 |
---|---|
[주기도문] 0_4/4_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_어린아이, 예수, 그리고 니체 (0) | 2019.02.02 |
[주기도문] 0_1/4_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_아빠, 시작이 전부다 (0) | 2019.01.30 |
[주기도문] 2_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0) | 2019.01.06 |
[주기도문] 4_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0) | 2018.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