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으로 응답하라

[주기도문] 2_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설왕은 2019. 1. 6. 17:11


고정 관념에 빠져 있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오랫동안 오해되어 왔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우리의 고정 관념의 결과였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이 왕으로서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통치하는 전제 군주 국가 혹은 우리나라 역사의 왕조국가와 같은 나라를 상상한다. 이렇게 이해하면 하나님 나라개념은 참 쉽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인 나라이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이해할 때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분을 실제적으로 왕의 자리에 앉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해낸 것이 하나님의 통치 개념이다. 하나님이 실재하는 왕이 될 수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조지 래드의 하나님 나라N. T. 라이트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에서도 비슷한 관점으로 접근한다. 이런 설명은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게 임한다는 측면에서 좋은 설명일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다스림이나 통치는 누가 힘을 가지고 있고 누가 그 힘에 복종해야 하는지 관계가 명확하게 나타난다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때 우리는 전제 군주 국가 형태의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인 하나님, 그리고 절대 복종을 강요당하는 백성들이라는 고정 관념을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상상은 매우 동화적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하나님의 왕국(The Kingdom of God)이다. 우리는 매우 이상적인 왕을 상상하고 그 왕을 하나님으로 대치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착하고 지혜로운 왕, 그리고 성품도 매우 좋아서 자신의 안위보다는 백성들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킬 각오까지 하는 성군(聖君)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하나님을 그런 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하나님이 왕이 되고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는 그런 일반적인 왕국과는 다른 나라이다. 우리의 상상이 매우 동화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실제 세상에서는 왕이 아무리 성군이라고 할지라도 왕과 백성은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는 동화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말은 아직까지 틀린 적이 없다. 물론, 그 절대권력을 하나님이 갖게 된다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절대권력을 갖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다. 만약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나라를 의미했다면 로마 황제를 끌어내고 예수가 황제가 되었어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들은 그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나라를 상상했을까? 로마 황제의 권력을 뺏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로마 제국의 대척점에 있는 나라이다.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통해 평화와 안녕을 유지하는 나라가 로마 제국이었다. 로마 제국의 문제는 황제의 자질이나, 성품 혹은 능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누군가는 갑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을이 되는 구조가 문제이다.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강조되는 조직에서는 필연적으로 억압당하는 희생자가 발생한다.

내가 20대 중반에 회사 다닐 때 직장 동료 중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집주인은 다 이상해.” 그 분은 대구에서 살다가 서울에 와서 세 들어 살면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분의 경험상 모든 집 주인은 다 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재수없이 계속 나쁜 집주인을 겪었나 보다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나, 나도 직장 경력이 길어지고 또한 이러저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을 겪어 보면서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집주인, 직장상사, 더 나아가 나와 갑을 관계 속에서 갑이 되는 사람들은 내가 느끼기에 불합리하게 행동할 때가 많이 있었다. 이것은 사람이 돈이 생기고 권력이 생기면 변질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갑을 관계에서 갑은 을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해 주기 어렵다. 그리고 을은 갑에게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피력하기 힘들다. 수직적 관계에서는 늘 이상함과 괴상함이 발생한다

Jovan Vasilievic, Christ Enthroned

1745, Krusedeol Monastery, Serbia

(Erich Lessing/Art Resource, N. Y.)


수평적 관계의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수직적 위계질서의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층에 하나님을 앉히고 우리가 그 밑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우리 스스로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또한 누군가를 지배하는 구조를 가진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수직적 위계 질서가 사라지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군가가 힘을 갖고 다른 누군가는 그 힘에 의해 지배를 당하는 나라가 아니다. 예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이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가장 약한 사람,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아파서 무시당하고 이용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해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왕권 강화를 위한 기도가 아니다. 전제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의 목적은 왕권 강화이다. 기억해보시라. 학교 다닐 때 역사 시험의 대표적 주관식 답안이 바로 왕권 강화였다. 왕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것은 백성들의 안위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는 민주주의에서 조선시대와 같은 왕조시대로 회귀를 바라는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이다. 아버지의 나라는 왕과 백성의 군신 관계가 아닌 아버지와 자녀의 사랑의 관계로 유지되는 나라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나라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대등한 관계를 가지는 나라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황제와 왕이 사라졌지만 수직적, 위계적 인간 관계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나라는 아직도 우리에게는 머나먼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나라를 위한 기도는 왕조 시대의 회귀를 위한 기도가 아닌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위한 기도이다. 우리는 아직 그런 시대를 경험한 적이 없다.



하나님 나라의 헌법 정신

이게 나라인가?”

2017년 촛불혁명 당시 우리를 거리로, 광장으로 불러낸 질문이다. 나라가 무엇인지, 국가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어떤 요소가 필요한지 정확히는 몰라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국가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건국 정신이다. 그리고, 건국 정신은 우리나라의 헌법에 담겨 있다. 결국 촛불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을 촛불과 함께 되살렸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12항이 없었다면 촛불혁명은 금세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도 헌법이 중요하다. 아버지의 나라의 건국 정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를 위한 기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고 모든 권력의 근원은 국민이라는 쉽고 단순한 대한민국의 헌법처럼 하나님 나라에도 헌법이 존재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기본 정신은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고 단순해야 한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면, 형편이 어려워 배움이 짧을 수밖에 없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면, 지식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념을 자신의 나라의 건국 정신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나라 헌법의 핵심 단어는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말 못하는 갓난 아이도 자신이 사랑받는지 아닌지 알고 있다. 어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식물도 자기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 알아차린다고 한다. 그래서 사랑받는 식물은 아름답고 균형잡힌 형태로 자라고 꽃도 잘 피우고 좋은 열매도 맺는다고 한다. 왜곡된 사랑도 있겠지만, 사랑이라는 아버지 나라의 핵심 원리와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실천이다. 우리는 사랑하기를 꺼려한다. 뭔가를 실천하기를 꺼려할 때 우리는 어리석은 척한다. 그것을 잘 모른다고 말한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못했다고 발뺌한다. 사랑 앞에서 많은 사람이 바보인 척 연기를 한다.

이스라엘의 율법 교사가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의 헌법에 대해 질문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태복음 22:35-40, 새번역)


예수가 밝힌 하나님 나라의 헌법이다. 이 마저도 길다. 예수는 요한복음 15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새번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똑같은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바로 서로 사랑하는 나라이다. 아버지의 나라는 서로 사랑하는 나라라는 단순한 설명은 사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하나님의 나라라면 무엇인가 좀 더 극적이고 신비하고 환상적인, 우리가 전에는 생각조차,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런 나라를 예상했던 사람들에게 예수의 설명은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어려운 질문에 예상 외로 쉬운 대답이 나와 버리면 사람들은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에게 와서 영생의 방법에 대해 물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황당할 정도로 난해한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10:25-29, 새번역)

예수의 대답은 너무 쉬워서 문제였다. 따로 생각하거나 숙고해볼 필요도 없었다. 율법교사가 생각할 때 예수의 대답은 너무 단순해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율법교사는 이웃의 정의에 대해 묻는다. 하지만, 이웃의 정의도 따로 내릴 것이 없다.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이웃의 정의를 내리는 대신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신비하고 심오한 답변을 기대했던 율법교사의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실천임을 일깨워 주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려면 혹은 우리가 그 나라 시민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 어린이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말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는 단순한 진리를 단순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 성경을 보면 예수는 어린이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다고 여러 번 언급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 11:25, 새번역)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18:17, 새번역) 어린이들에게 여러분, 서로 사이좋게 지내세요혹은 옆에 있는 친구 안아 주세요라고 말을 하면 못 알아들을 리 없다. 이러한 가르침에 수긍을 하면 라고 대답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선생님, 저는 쟤랑은 사이좋게 지낼 수 없어요라고 단번에 반박을 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니다. 어른들은 자신을 숨기는 데 능숙하다.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사이좋게 지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내 이웃이 아니라고 규정하거나 혹은 그냥 사이좋게 지내는 척한다.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더 교묘하게 자신을 꾸미고 자기자신의 본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Max Liebermann, The Twelve-Year-Old Jesus in the Temple

1879, Hamburger Kunsthalle, Ham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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