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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_알베르 카뮈 "이방인"

설왕은 2019. 12. 26. 09:00

 

 

#설왕은TV #이방인 #알베르카뮈

 

카뮈의 "이방인"은 책 제목이 사람들을 밀어냅니다. '뭐야, 이방인? 재미없을 것 같은데.' 이렇게 생각하기 쉽죠. 또 작품성이 뛰어나다고 하는 작품들이 대개는 재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노벨상 작가 카뮈가 지은 "이방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작품성만 뛰어난 심각하고 재미없는 소설일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카뮈의 이방인을 분명히 중고등학교 때 읽었을 텐데요. 별다른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분명히 읽어봤을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는 것 보니 되게 재미없었나 보다, 하고 지레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첫 문장이 저를 붙잡고 소설 속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사실, 그다음 두 문장이 더 충격적이었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저는 미국에서 10년 간 유학 생활하면서 이방인으로 살았는데 거기서 '나'를 지탱해 준 존재가 바로 '엄마'였습니다. 미국에서 엄마의 소중함을 깨달았죠. 엄마가 없는 세상은 저에게는 아직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세계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 마치 온 세상이 저에게 "너는 이방인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엄마와 통화할 때는 저는 이방인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가 공중전화를 통해서 진짜 현실 세계로 소환되는 것처럼, 저도 엄마랑 전화하면 저를 이방인으로 부르는 세상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첫 문장을 보면서 '어, 그래서 주인공은 이방인이 되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모두가 나에게 등을 돌려도 엄마는 자식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니까요. 저는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엄마가 죽었기 때문에 삐뚤어져서 결국 이방인이 되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다음 문장에서 제 예상이 빗나간 것을 알았습니다. '엄마가 죽었는데 어제였는지 오늘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모르는데 정확히 알아볼 생각 없이 그냥 모른다고 말을 해? 이 친구 중2인가?'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세상 사람들과는 원래 좀 다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목이 이방인이죠. 제 생각에 주인공 뫼르소는 엄마가 없었기 때문에 더 이방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카뮈의 의도적인 구성이었을 겁니다. 

 

심오한 철학이 들어있는 것 같은 작품은 그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정말 분분한데요. 남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출판사 <열린책들>의 번역으로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중에 산 책은 <책세상>에서 나온 책이었습니다. 번역자가 다릅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이방인의 역자 서문에 보면 "진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사내의 이야기"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저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관계는 왜곡된 바가 별로 없거든요. 그리고 뫼르소는 진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영웅적인 면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뫼르소 자신의 생각이나 표현 방식이 보통 사람과 달랐던 거고요. 그것에 대해서 타협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뫼르소는 그냥 뫼르소가 되고 싶었던 것이죠. 마치 중2의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는 사고방식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유죄를 몰고 가는 사람들의 주장은 이런 것입니다. "엄마의 죽음을 남들이 슬퍼하는 방식대로 슬퍼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뫼르소는 이에 대해 반대하고 있습니다. 뫼르소는 엄마가 죽었을 때 남들이 슬퍼하는 방식대로 슬퍼하지는 않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는 내내 엄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냅니다. 엄마의 말들을 기억하고 그것을 곱씹어 보기도 하죠. 그가 어려움에 빠진 상황에서 마음속에서 그에게 말을 거는 존재는 철학자나 성인, 혹은 여자 친구가 아니라 엄마였습니다. 사회적 통념과 관습과는 다르지만 뫼르소는 엄마에 대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충분히 그랬습니다. 

 

 

이방인이 실존주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실존주의라는 말 자체가 워낙 다양하게 이해되는 말이지요. "이 책은 실존주의 작품이다"라는 말 자체는 특별한 의미를 주기 어렵습니다. 그 말은 "이 책은 어렵다"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실존주의도 철학자마다 다르거든요. 제일 유명한 사람은 하이데거인데, 제가 볼 때는 카뮈의 작품은 하이데거보다는 후설의 현상학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후설의 현상학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후설 철학의 요점 중 하나가 "인간의 모든 고정관념을 벗어나라"입니다. 책 뒷부분의 해설에도 나오지만 이 책에 대한 카뮈의 설명이 정확하게 이를 뒷받침해줍니다. 카뮈는 이방인을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지는 위험을 겪게 된> 어떤 젊은이가 술책을 쓰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남음으로써 결국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라고 소개했습니다. 제가 볼 때 카뮈의 설명은 정확히 그가 무엇을 쓰고 싶었는가를 드러내 줍니다. 사회적 통념과 관습에 대한 거부죠. 그것이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뫼르소의 삶의 방식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뫼르소에게 자신들에게 맞추라고 하지만 뫼르소는 거부합니다.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냥 그게 자기는 아니었으니까요.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결혼에 관한 그의 생각입니다. 그는 여자 친구 마리를 사랑하지만 결혼 따위는 하든지 말든지 큰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마리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혼이라는 사회적 관습을 따라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통념의 최종 보스라고 여겨질 만한 사제에게 뫼르소는 분노를 품고 달려듭니다. 

 

제가 좀 이상하게 느낀 부분은 뫼르소가 항소를 거부한 사실입니다. 항소를 거부하면서 소설은 끝이 납니다. 뫼르소는 끝까지 자기 자신을 지킵니다. 자기 자신의 경험과 감정과 논리적인 사고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말을 합니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뫼르소는 삶의 기쁨을 아는 사람이거든요. 태양 아래 해변에서 느끼는 따뜻함과 시원함과 해방감을 충분히 즐기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감옥에서 자신의 일상을 복기하듯이 기억하면서 그 추억만으로도 행복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설사 생을 단 하루밖에 살지 못한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옥 안에서 별로 힘들이지 않고 1백 년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지닌 추억의 양은 지루함을 채우기에 충분하리라.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특권이기도 했다." (113)

 

뫼르소는 단 하루의 삶으로도 영원히 기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삶을 긍정하고 삶을 즐겁게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보통은 감옥에서 나와서 세상 속에서 그런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타협하거나 혹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재판을 진행시킬 것 같은데요. 뫼르소는 그러지 않습니다. 과자를 하나 먹었는데 그것이 너무 맛있으면 어떻게 할까요? 또 그 과자를 먹겠지요. 보통 그렇습니다. 뫼르소는 과자를 하나 먹었는데 그 과자를 또 먹으면 그와 비슷한 행복감을 누릴 것을 알고 있지만, 이미 하나 먹은 행복감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다시 하나 먹을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특이한 사람입니다. 

 

"거기서도, 그러니까 이제 차츰차츰 생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주변에서마저도 역시 저녁은 애수 어린 휴식의 시간 같았지. 그처럼 죽음에 가까이 이르러서 엄마는 자신이 자유롭게 해방되어 있으며, 따라서 다시 모든 것을 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진정 아무에게도 엄마에 관해 울 권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나 또한 엄마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다시 살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꼈다. 좀 전의 거대한 분노가 내 속의 악덕을 씻어 내고 희망을 비워 낸 것이기라도 하듯, 나는 기호들과 별들로 가득한 밤 앞에 서서 처음으로 세상의 애정 어린 무심함을 향해 나 자신을 열었다. 세상이 그처럼 나와 닮았다는 것을, 요컨대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나는 내가 행복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마무리되길." (171)

 

 

카뮈의 이방인이 출판되었을 당시에는 매우 큰 충격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그다지 충격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카뮈와 같은 선구자들의 노력으로 인해 비슷한 작품들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 작품들 속에서 뫼르소보다 더 개성이 뚜렷하고 사회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 인물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소설은 많지만, 좋은 소설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에는 나쁜 소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은 좋은 소설입니다. 카뮈가 기반을 두고 있는 그의 철학은 그가 쓴 "시지프 신화"를 읽어 보면 윤곽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데요. 그가 가진 철학도 저는 마음에 듭니다. 어떤 생각에서 뫼르소가 탄생했는지 알고 나서 저는 이방인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의 삶도 뫼르소에게는 충분한 기쁨이었다는 것은 소설 여기저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문장을 옮깁니다. 

 

"공판이 끝났다. 법원에서 나와 호송차에 오를 때 나는 아주 잠깐 여름 저녁의 냄새와 색채를 알아보았다. 움직이는 감옥의 어슴푸레함 속에서 나는, 마치 내 피곤의 바다에서부터 길어 올리듯, 내가 사랑했던 도시와 내게 흡족함을 안겨 주던 어떤 특정한 시각이 발산하는 온갖 친숙한 소리들을 하나하나 다시 발견했다. 이미 완만하게 누그러진 대기를 향해 솟아오르는 신문팔이들의 외침, 작은 공원에서 지저귀는 마지막 새들, 샌드위치 장수들이 손님 부르는 소리, 도시의 경사진 모퉁이를 돌아가는 전차들의 신음, 그리고 다리 위로 밤이 내리기 전 하늘에 번지는 저 수런거림........ 이 모든 것들이 내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그러나 이제는 앞이 보이지 않는 맹목의 행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다. 때는 아주 오래전 내가 나 자신의 충만함을 느끼곤 하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137)

 

 

* 참고로 카뮈는 잘 생겼습니다. 그래서 인기가 아주 많았습니다. 카뮈는 20대 초반에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는데 아내 시몬 이에가 마약에 중독되어서 그 갈등으로 인해 결국 이혼합니다. 이에의 어머니가 안과 의사였는데요. 이에가 생리통으로 고생하자 엄마가 모르핀 주사를 놔주었고 이때 환상을 경험한 이에는 모르핀 중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카뮈는 아내 이에가 마약을 끊을 수 있도록 도우려고 했는데요. 결국 실패했죠. 잘 생기고 생각도 바른 사람인데 젊을 때 너무 아픈 경험을 해서 그랬던 것일까요? 카뮈는 이혼하고 나중에 다른 여인을 만나서 또 결혼하지만 그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카뮈는 이 세상과 이별할 때도 참 허망하게 갔습니다. 교통사고로 1960년에 47세였던 카뮈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소설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도 매우 극적이었습니다. 

 

*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중 3 정도만 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카뮈의 이방인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다들 자기도 소설을 쓸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쉽게 쓰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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