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몽상가의 연애 실패담_도스토옙스키 「백야」

설왕은 2019. 12. 13. 09:00


제가 진짜 읽고 싶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입니다. 그러나 그 형제들은 너무 깁니다.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좀 짧은 작품이 없을까 찾던 중에 발견한 작품이 이 작품  백야」입니다. 제목을 보면 재밌을 것 같았습니다. 백야는 밝은 밤이잖아요. 밤에는 보통 어두운데 하얀 밤은 흔하게 겪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특정한 지역 아니면 백야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흔하지 않은 백야처럼 이 작품을 통해서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 "백야 외" 붉은여우, 지식의숲 


백야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으로는 정말 짧은 작품입니다. 그래도 저는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치밀한 심리 묘사와 같은 것을 기대했는데 그런 것과는 거리가 좀 멀었습니다. 저는 글을 읽으면 뭔가 좀 어색한 느낌을 계속 받았는데요. 나중에 그 이유도 알 수 있었습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상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어느 날 위험에 빠진 아가씨를 구해 줍니다. 그 아가씨의 이름은 나스첸카이고요.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나스첸카는 어떻게 삶을 살아왔는지 서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스첸카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고 그 집에서 하숙생으로 있던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스첸카가 사랑했던 그 남자는 일 년 후에 돌아오겠다면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났지요. 나스첸카는 그 남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가 나타나지 않아 나스첸카는 하루하루 절망의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는 나스첸카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 나스첸카의 편지를 전달해 주는 등 두 사람의 사랑이 이어지기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남자에게서 답이 없자, 나는 나스첸카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도 나에게 사랑을 맹세했습니다. 그렇게 나의 사랑은 이루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스첸카의 그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나스첸카는 주저함 없이 그 남자에게 달려갑니다. 나스첸카는 다음 날 나에게 편지를 보내 용서를 구하고 영원히 사랑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내용은 정말 단순합니다. 전체적인 내용도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고요. 아주 특이한 일도 아닙니다. 


덧없이 끝나 버린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은 사랑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도 여기서 도스토옙스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당신의 하늘이 언제나 높고 푸르기를...... 당신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하느님의 은총이 늘 당신과 함께하기를!
당신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느 외로운 가슴에 행복과 기쁨을 주었으니까....
아아, 더없는 기쁨! 완전한 행복이여!
인간의 기나긴 삶에 있어서, 한순간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그것이면 결코 부족함이 없는 삶이 아니겠는가. (139)
  
정말 짧은 순간의 사랑이었지만, 주인공은 사랑했으니까 행복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덧없이 지나간 사랑이었지만 그래도 한순간이라도 지극한 행복을 느꼈다면 부족함이 없는 삶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몽상가입니다. 소설 내내 어색했던 분위기는 주인공인 내가 몽상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도 상상으로 하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사물들과도 대화를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꿈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상상으로 하는 사랑에는 아픔이 없습니다. 아픈 사랑을 사랑을 상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사랑을 시도해 보죠. 나스첸카에게 고백하고 사랑의 맹세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했던 순간은 너무 짧게 끝나버립니다. 사랑의 아픔을 맛보고 세상에 대해 비관하고 저주를 퍼부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나는 긍정의 힘을 발휘합니다. 실연의 아픔을 이토록 명랑하게 극복할 수 있다니, 하고 생각할 정도로 주인공인 나는 아픔을 가볍게 넘겨 버립니다. 오히려 그 짧은 사랑의 시간에 감사하죠. 

 

도대체 도스토옙스키는 어떤 상황에 있었길래 이런 작품을 썼는지 궁금했습니다. 인생의 아픔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티없이 맑은 명랑소설 같은 연애 실패담을 펼치고 있는데요. 그가 다른 작품에서 보여 주는 인간 내면의 복잡다단하고 어두운 감정의 심연에 비추어 볼 때 과연 같은 작가가 쓴 작품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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