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탕자와 서투른 아버지

설왕은 2018. 12. 30. 11:29

누가복음 15:11-32 (탕자의 비유)


탕자의 비유를 대할 때 우리의 관점은 고정관념에 빠져 있다. 탕자의 비유를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위대함을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 때로는 이 비유가 재물을 흥청망청 쓴 못난 아들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지나친 사랑을 실천하는 탕부의 비유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나는 이 비유의 초점이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탕부라는 표현에 일부 찬성한다. 확실히 이 비유는 제목부터 요점을 파악하기 어렵게 전해져왔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비유에 나온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할 수 있는 좋은 아버지와는 거리가 멀다. 탕자의 비유에 나온 아버지가 분명히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 당시 사회 기준으로 볼 때는 다른 아버지보다 더 좋은 아버지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상식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는 훌륭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몇 가지 이유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는 너무 수동적이었다. 

당신의 아들이 실종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경찰서에 신고하고 전단지를 만들어서 아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물론, 탕자는 실종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아버지는 아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훤히 알고 있었다.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받은 유산이 어떻게 될지 아들이 결국 어떤 상황에 처할지 알고 있었다. 보통의 아버지라면 아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러나, 탕자의 아버지는 지극히 수동적이었다. 그가 한 것은 그저 기다린 것 뿐이었다. 


2. 그는 무책임했다. 

아들이 자신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면 주는 것이 좋은 아버지일까? 아니다. 아들이 아직 분별력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아들을 설득했어야 했다. 대화를 했어야 했다. 아들이 유산을 달라고 한 것 자체만으로도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대화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으면 받을 수 있는 유산을 지금 달라는 것이었는데 아무말 없이 그 유산을 내주는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아들은 아버지에게 대단한 불만이 있었던가, 아니면 주체할 수 없는 야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들이 돈을 달라는 대로 다 주는 부모를 훌륭한 부모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돈이 사람을 망칠 수도 있다. 


3. 그는 첫째 아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서투름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 탕자가 돌아왔을 때 탕자의 형의 반응이다. 아침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막장 스토리가 나온다. 자기 동생이 몇 년 만에 돌아왔는데 기뻐하기는커녕 집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정상적인 집이라면 첫째 아들이 자신의 마음이 좋지 않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대놓고 아버지에게 적대감을 드러낸다. 그것은 탕자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잘못이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중간중간 격려해주고 사랑을 표현했어야 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탕자가 돌아와서 집안의 갈등은 더 깊어졌다.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사랑은 얼마나 위대한가'의 초점을 벗어나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초점은 아버지 사랑의 위대함이 아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 탕자 비유는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더 편애하는 것 같은가?'에 대한 대답이다. 



'사랑해설' 중에서



사람들은 흔히 가출한 아들의 비유를 대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측면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가출한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허비했다는 이유로 주로 탕자라고 불려 왔다.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탕자의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위대한가”로 귀결된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둘째 아들에게는 위대했지만 첫째 아들에게는 어이없는 것이었다. 가출한 아들의 비유에 나온 아버지는 불공평함의 측면에서 보면 거의 신데렐라의 계모급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가출해서 유산을 다 탕진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돌아오자 그를 극진히 환대한다. 그러나, 늘 아버지 곁에서 충실히 그 역할을 묵묵히 해냈던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흔쾌히 내어준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위대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특정한 대상에게만 위대하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착각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둘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출한 아들의 비유는 이에 대한 설명이다.



예수는 자신의 행동의 비합리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탕자의 비유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 감정에 호소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사실 탕자의 아버지는 보편적인 기준에서 보면 그리 훌륭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탕자의 아버지를 하나님에 빗대어 그 사랑의 위대함을 칭송하지만 사실 탕자의 아버지는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요새도 가출하는 청소년이 많은데 우리는 그들의 가출을 단지 그들 자신의 문제로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집안이 화목하고 웃음꽃이 피는데 아이만 좀 이상해서 가출하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 가출하는 청소년이 있는 집은 그 집의 엄마, 아빠에게 문제가 있을 때가 많다. 아이들은 집에서는 약자이다. 집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사람은 대개는 아빠, 엄마이다. 아이들이 집에서 사는 것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단지 그들이 사춘기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대화할 수 없는 아빠, 엄마의 책임이 클 것이다.



사실 탕자의 가족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는 것은 이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첫째 아들의 반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첫째 아들은 어디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던 자신의 동생이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생에게 잔치를 열어 준 아버지에게 적개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형은 탕자를 자기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언급하며 동생과 자신은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말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탕자의 귀환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을 납득할 수 없더라도 대놓고 증오심을 드러내며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동생에게 잘 돌아왔다고 말하며 손을 잡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 아들의 반응은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하다. 아버지와 첫째 아들의 관계도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James Tissot,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882, 

Collection Manney (Bridgeman/Art Resource, N.Y.)



종교와 고정관념에 가리어져 있던 

예수의 '진짜 사랑'이야기

<사랑해설: 예수가 그린 사랑> 

설왕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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