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누가복음 1:57~66 "사가랴와 두려움"

설왕은 2019. 3. 9. 15:30

( 1:57-66, 새번역)

[57] 엘리사벳은 해산할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 사람들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자비를 그에게 베푸셨다는 말을 듣고서,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아기가 태어난 여드레째 되는 날에, 그들은 기에게 할례를 행하러 와서,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그를 사가랴라 하고자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가 말하였다. " 됩니다. 요한이라고 해야 합니다." [61] 사람들이 말하였다. "당신의 친척 가운데는 아무도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62] 그들은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려는지 손짓으로 물어 보았다. [63]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하고 쓰니, 모두들 이상히 여겼다. [64] 그런데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65] 이웃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다. 모든 이야기는 유대 산골에 두루 퍼졌다. [66]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사실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 아기가 대체 어떤 사람이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이 아기와 함께 하시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제목: 사가랴와 두려움

 

1. 들어갑니다

누가복음에는 세례 요한의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가 길게 나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죠. 천사 가브리엘은 당시에 매우 바빴을 같아요.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느라 말이죠. 예수님의 탄생은 아이를 낳을 없는 여인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명은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낳을 없는 여인 엘리사벳이었고요, 다른 명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 마리아였습니다. 엘리사벳을 통해서 세례 요한이 태어났죠. 세례 요한은 광야의 소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가브리엘은 엘리사벳의 남편이었던 사가랴와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가브리엘이 전하자 사가랴와 마리아의 반응은 비슷했습니다. 사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어떻게 내가 아이를 낳을 있죠?” 사람의 반응이 모두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가랴만 벌을 받았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없었습니다.


2. 본문 설명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만난 이야기가 오늘의 본문 바로 앞부분에 나오고요. 오늘은 다시 사가랴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사가랴가 가브리엘은 만난지 정도 지났습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자 그녀의 친척과 이웃들이 찾아와 아이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베풀고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려고 하였습니다. 친척들과 이웃들은 모여서 아이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고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반대를 합니다. “ 됩니다. 저는 아이를 요한이라고 부를 겁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손사래를 쳤죠. 왜냐하면 가족과 친척들 중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이번에는 사가랴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어야 할지 물었습니다. 그는 말할 없었기 때문에 글씨를 써서 보여줬습니다. 사가랴도 요한이라고 썼죠. 순간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말을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습니다. 그리고 소문은 유대 지방에 널리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겠죠. ‘ 아이는 어떤 사람이 것인가?’ 아이에게 뭔가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3. 원리 적용

- 사람들은 두려워했을까요? 사가랴가 다시 말을 있게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뻐하기 보다는 두려워했을까요? “ 대박, 사가랴가 다시 말을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렇게 반응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가랴가 말을 있게 되자 주변 사람들의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두려움은 항상 대상을 가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죠. 그들이 하나님이 일하심을 알았을 기뻐하지 않고 두려워 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희망이 없는 같았습니다.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주권도 없고 왕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만나 주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믿을 없었죠.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죠.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냥 이론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힘이 가진 것은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명령에 굴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죠.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이 다윗과 같은 이스라엘의 왕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졌죠. 왕이 와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가랴의 입이 열렸을 그들을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 ( 9:10, 새번역)우리는 주님을 두려워 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없는 같으시니까요.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 같거든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실 것을 희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바깥에 계신 같습니다. 우리가 동안 교회에 가지 않아도 아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건강하게 지내고 돈도 벌고 공부도 있습니다. 일요일마다 나가서 교회가 아닌 교외에 나가서 햇빛을 즐겨도 우리의 삶에 먹구름이 끼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힘이 있으시지만 부드럽게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말을 듣는다고 죽이고 그러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을 죽이겠다고 달려들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말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인 자들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십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죠. 그래서 저는 이렇게 질문을 바꾸고 싶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놀랄 준비가 되셨습니까?” 세상이 어두움으로 가득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두려움이 임할 것입니다. 두려움이 오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지혜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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