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마르다와 마리아, 그날의 분위기

설왕은 2018. 10. 26. 08:35

 

마르다는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분위기는 그렇게 화기애애하지는 못했죠. 문제는 마리아였습니다. 마르다는 정신 없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과 희희낙락하고 있었어요. 혼자 일하던 마르다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어요. 참다 못한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달려갔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웃음 소리 요란한 대화에 마르다가 불쑥 끼어들었어요. 끓어오르는 짜증을 억제하면서 최대한 예의바르게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저 혼자 일하니까 너무 힘듭니다. 마리아에게 도와 달라고 하는데 제 말을 안 듣네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저 좀 도와 달라고 명령해주세요."

 

그날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마리아는 칭찬받을 일을 했고 마르다는 뭔가 잘못한 걸까요?  

 

 

 

"생명의 신성함과 어떤 경우에도 살아 있어야 한다는 의무를 강조하는 기독교가 긍정적인 노동철학을 결코 발전시키지 못했던 이유는 모든 인간활동에 앞서 관조적 삶을 최우선시했기 때문이다. '관조적 삶은 활동적 삶보다 단적으로 우월하다.; 그리고 행위의 삶의 가치가 무엇이든 간에 관조에 헌신하는 삶의 가치들이 '보다 효과적이고 강력하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인용 -> 아렌트의 생각과 다름) 이러한 확신은 사실 나사렛 예수의 설교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이 확신이 그리스 철학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426-27p)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중 일부분입니다. 위의 인용 부분을 보면요. 아렌트가 아퀴나스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아퀴나스는 관조적 삶이 활동적 삶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아렌트의 입장은 활동적 삶, 행위의 삶이 관조적 삶보다 더 낫다는 입장입니다. 아렌트가 설명하고 있듯이 관조적 삶의 우월성에 대한 기원은 기독교 전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에 있습니다. 

 

아렌트의 주장을 기독교식으로 쉽게 풀어서 말하면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마리아가 마르다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왔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리아를 나무랍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은 마리아를 변호하고 마리아가 좋은 선택을 했다고 말씀하시죠.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의 교훈은 '말씀 듣는 마리아, 기도하는 마리아가 노동하는 마르다, 저녁짓는 마르다보다 우월하다'는 식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아렌트의 말에 따르면 이런 관점은 그리스 철학에서 기반한다는 것이죠. 아렌트는 예수의 설교에서 관조적 삶의 우월성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적이라고 여기는 많은 주장들이 사실은 그리스 철학에 기반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 예수의 비유로 풀어 본 사랑 이야기 "사랑해설"(설왕은 지음)
http://aladin.kr/p/0L760

 

사랑해설

종교의 껍데기와 고정관념에 의해 가리어져 있던 예수의 진짜 사랑 이야기. 왜, 어떻게,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사랑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은 무엇인지 다룬다. 사랑이라는 렌즈를 통한 상식

www.aladin.co.kr

 


 

 

<사랑해설: 예수가 그린 사랑> 중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일화에서는 눈여겨볼 만한 두 명의 이웃이 나온다. 그 두 사람은 바로 마르다와 예수이다. 먼저, 마르다는 예수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 예수는 자신의 필요를 주위 사람에게 호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볼 시간은 없었다. 제때 식사를 할 겨를도 없었다. 그때 예수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 바로 마르다였다. 모든 사람이 예수에게 무엇을 얻을까 생각하고 예수에게 달려들었지만 마르다는 내가 어떻게 예수를 도와줄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예수를 사랑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을까 생각하고 실천에 옮겼다

 

교회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설교가 행해질 때마다 마르다는 마리아에 비해 영적이지 못한 사람, 물질적인 것에 신경 쓰느라고 근심에 가득 차 있고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망각한 사람으로 치부된다. 누군가 “당신은 마르다인가, 마리아인가?”라고 묻는다면 이 질문은 곧 “당신은 세상적인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람인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마르다가 하늘 나라에서 이 땅의 교회 안에서 전해지는 자신과 관련된 설교를 들을 수 있다면 그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저녁 식사 행사를 기획하고 제작하고 감독한 사람은 분명 마르다였다. 식사를 준비하고 자리를 배치하고 음식을 구성하고 서빙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바로 마르다였다. 마르다 없이 이 저녁 식사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예수에게 필요했던 것은 예수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라 휴식과 식사였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에게 자신의 이웃이 되어 달라고 아우성칠 때 마르다는 반대로 예수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에서 수많은 마르다들은 귀한 일을 감당하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주위의 마르다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정말 성심성의껏 하나님을 섬기듯 교회 공동체의 여러 가지 일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교인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건물을 청소하고 젊은 부부들의 아기를 돌보고 새로 온 사람을 안내하는 등 연약한 자들의 이웃이 되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들을 격려하고 칭찬하지는 못할 망정 그들에게당신은 마리아인가, 아니면 마르다인가?”라는 묘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을 들으면 그들은나는 너무 마르다인가?’라는 죄책감을 갖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교회에서 마르다의 가치가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르다가 없었다면 마리아는 예수를 독대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마르다가 예수의 이웃이 되어 주었듯이 지금 이 시대의 마르다들은 자신의 주변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 사람들이다.

 

교회에서는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나도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시대의 많은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는 행위 자체의 껍데기만 남고 그 내용을 몸으로 살아 내는 실천은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의 말씀만 중요시하다 보니극단적인 마리아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찬송가 반주를 틀어 놓고 찬송가를 부르고 혼자 기도하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 그러나, 혼자 예배를 드린다면 예수가 전한 이웃 사랑의 메시지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이웃을 만날 수 없다면 이웃의 말을 들을 수 없다면 이웃에게 식사를 대접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심지어 교회에 출석하는 기독교인들도 이런 경향을 가지곤 한다. 많은 이에게 기독교 예배는 구경거리로 전락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행위 자체가 절대선이 되어 버렸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일화에서 마르다가 예수의 이웃의 되어 주었듯이 예수는 마리아의 이웃이 되어 주고 있다. 마리아는 목소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 일화에서 마르다와 예수만 서로 대화할 뿐 마리아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사실 마리아는 좀 눈치가 없었던 것 같다. 예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지금으로 치면 인기 있는 연예인과 같은 사람이었다. 예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과 제대로 된 식사였는데 마리아는 예수의 상황을 배려해 주지 않았다. 그저 예수를 직접 마주 대한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그래서 그 옆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하루 종일 사람들을 상대했던 예수는 쉬러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마리아 덕분에 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르다는 철딱서니 없는 마리아가 예수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한마디할 때 예수가 마르다 편을 들어 줄 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하고 있는데 예수와 같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신기하고 좋아서 그 옆에 앉아 마냥 웃고 있는 마리아와 그런 마리아를 무안하게 할 요량으로 핀잔 섞인 한 마디를 하고 있는 마르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를 대변하고 마리아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바로 예수였다. 이 이야기의 등장 인물,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예수 중에 가장 무시당하기 쉬운 사람이 바로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여자였고 그리고 마르다보다 어렸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사람 수를 셀 때 여자와 어린 아이는 빼고 셌다. , 여자와 어린 아이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여자, 그 중에서도 나이가 더 어린 여자가 가장 무시당하기 쉬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마리아가 바로 그런 입장이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로부터 변호를 받는다.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 마리아가 좋은 일을 택했는데 왜 뺏으려고 하지? 나는 마리아가 선택한 일을 뺏을 생각이 없다.” 예수는 마리아가 자신이 원하는 일, 자신에게 좋은 일을 택했고 예수 자신도 마리아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예수는 이와 같이 사회에서 소외받고 무시당하는 계층을 변호하고 그들을 자신의 이웃으로 삼았다.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 주위로 몰려들어 왔을 때 제자들은 그들을 내쫓으려고 했지만 예수는 그들을 안으며 이렇게 변호했다. “어린아이들을 내쫓지 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아이들의 것이다. 이런 어린아이들과 같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런 말을 듣고 어린아이들을 내쫓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의 꾸지람에 아무 말도 못하고 쫓겨날 위험에 놓여 있었지만 예수는 이들을 변호하고 나섰다.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은 오히려 쉽다. 그러나, 세상에는 목소리 없는 자가 있다.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당히 말할 수조차 없는,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자가 있다. 사회적 약자 계층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어린이들, 계약직 노동자들,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 그리고 남녀평등 지수가 현저히 낮은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런 위치에 있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가볍게 그들을 무시해 버리기 쉽다. 예수가 좋은 이웃이었던 이유는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이웃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마리아의 이웃이 되어 주었지만, 마르다는 좀 섭섭했을 것도 같다. 예수는 마리아의 이웃이 되어 주었지만 왜 마르다의 필요에는 응답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섬기기 위해 열심히 음식 준비하고 있던 마르다를 도와 주라고 마리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성경에는 예수가 마리아를 변호해 주고 난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서술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분명히 마리아가 마르다를 도와 주었을 것 같다. 마리아는 언니의 핀잔과 함께 부엌으로 끌려가게 되는 상황이었는데 예수가 마리아의 편에서 그녀를 변호해 주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부터 변호를 받는 가슴 벅찬 경험을 했다. 그 순간 분명히 마리아의 자존감이 수직 상승했을 것이다. 사람이 높은 곳에 올라가면 시야가 넓어지는 법이다. 그때야 비로소 마리아의 눈에 언니 마르다의 필요가 들어왔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질문은당신은 마르다인가, 아니면 마리아인가?”가 아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예수와 같은 이웃인가?”

 

우리 주변에는 목소리 없는 자들이 많다. 예수라면 분명히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 옆에서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것이다

 

 

 


종교와 고정관념에 의해 가리어져 있던 

예수의 '진짜 사랑'이야기

<사랑해설, 예수가 그린 사랑> 설왕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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