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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세계] 나는 나-너를 통해 태어난다_마르틴 부버 "나와 너"

설왕은 2020. 8. 19. 15:31

마르틴 부버, <나와 너>, 표재명 역 (서울: 문예출판사, 1995)

 

 

마르틴 부버(1878-1965)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대인 철학자입니다. <나와 너>는 1923년 그가 45세 되는 해에 출간한 책으로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부버는 "나와 너"를 출간한 해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교수로 초빙받아 유대교 철학과 종교사 등을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나와 너"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책입니다. 제목은 다소 추상적이어서 무슨 책인지 감을 잡기가 어려운데요. 나온 지 100년 정도 된 책이지만 그의 생각의 깊이를 헤아리고 책에 나온 내용대로 실천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책의 제목대로 사람은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부버의 주장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버의 주장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는 타인 없이 스스로를 파악할 수 없고, 너와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완성되어가는 존재입니다. 사실 요새의 사회 분위기와는 다소 역행하는 주장이죠. 최근에 유행하는 주장은 타인에 대한 신경을 최대한 끄고 나를 발견하고 나를 알아가서 타인이 원하는 내가 아닌, 나 스스로의 나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데요. 저는 사실 최근의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우리 공동체 그리고 인류 전체에게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부버의 주장이 훨씬 더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1. 처음에 관계가 있다. (28)

 

부버는 인간은 관계의 존재임을 역설합니다. 아마도 이 말은 요한복음 1장 1절을 차용해서 단어를 바꾼 것으로 보이는데요.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입니다. 인간은 그 외에 다른 어떤 존재도 아닌 바로 관계의 존재라는 것인데요. 상식적으로 이 말은 생각할 것도 없이 맞는 말입니다. 인간의 삶은 수없이 많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자연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고요.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물건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버는 관계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다행이죠. 두 가지밖에 안 되니까 기억하기 좋습니다. 그 두 가지 관계의 종류는요. 하나는 나-너의 관계이고요. 다른 하나는 나-그것의 관계입니다. 나-너의 관계는 내가 어떤 대상을 객체화시키지 않고 그러니까 어떤 대상을 내 중심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 대 주체, 인격 대 인격의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버에 따르면 인간이 나-그것의 관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사람이 사용해야 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때로는 사람과의 관계도 나-너의 관계가 아닌 나-그것의 관계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그것의 관계를 통해서 나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나-너의 관계 속에서 내가 발견되죠.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바로 나-너의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동의합니다. 

 

2.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19)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왜 사냐건 웃지요, 라는 유명한 문장이 있습니다.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마지막 연의 내용이지요.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요.
갱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어렸을 때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이 시인은 왜 사는지 잘 몰라서 웃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랬을 수도 있지요. 자연 속에서 남으로 창을 낸 작은 집을 하나 짓고 밭을 가꾸어 먹을 것을 구하고 구름도 보고 새의 노랫소리도 들으면서 이웃과 더불어 곡물을 나누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지 뭐 특별한 이유가 있겠느냐는 의미일 것도 같고요. 그래도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웃지만 말고 대답을 해주면 궁금한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버의 대답은 아주 짧게 말하면 "삶은 만남이다"는 것이지요. 밥 먹고 일하고 잠자고, 뭐 그런 것도 다 삶이지만, 참된 삶, 진짜 삶은 바로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만남을 많이 가지는 사람은 좋은 삶을 사는 것이고 나쁜 만남을 가지는 사람은 나쁜 삶을 사는 것이고요. 만남을 꺼려하는 사람은 참된 삶을 거부하는 사람일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나-너의 관계보다는 나-그것의 관계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떤 것을 가질 수 있느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 만남을 가질 때가 많고요. 그럼, 참된 삶이 만남이면, 만나서 뭐 할 거냐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서 무엇을 할까요? 얘기하죠. 차를 마시면서 얘기하던가 밥을 먹으면서 얘기하던가,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얘기합니다. 부버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말한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라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만나서 서로 말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죠. 그래서 참된 삶은 만남입니다. 

 

 

3. 온 존재를 기울여 자신의 '너'에게 나아가고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를 자신의 '너'에게 가져가는 사람만이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103)

 

부버는 나-너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태어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너는 나의 이웃 사람을 의미하기도 하고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부버가 영원한 너라고 칭하는 신입니다. 이웃이 타자인 것처럼, 신 역시도 나에게는 타자입니다.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라는 뜻이지요. 나-너의 관계를 통해 내가 발견된다는 말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내가 발견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영원한 너인 신을 통해서 내가 발견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나 스스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너를 통해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너는 내가 아니지만 내 안에서 발견되는 존재입니다. 신비주의 영성가와 기독교의 교부들이 말한 것과 비슷하게 부버는 영원한 너인 신은 나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너를 발견하고 영원한 너를 통해서 나를 봐야 내가 보인다는 말이고요. 동시에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도 영원한 너를 통해서 봐야 제대로 보인다고 주장합니다. 세계를 신 안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신 앞에 있는 사람이라고, 그 사람은 신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부버는 말합니다.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혹은 세상을 외면함으로써 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을 통해 세상을 보는 사람이 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건데요. 알듯 말듯한 말입니다. 

 

저는 15년 전쯤에 이 책을 샀고요. 그때 대충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2019년에 쭉 한 번 읽어보았고요. 이번에 또 중간중간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이 책을 한 10번 정도는 더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 처음에 관계가 있다. (28)

2.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19)

3. 온 존재를 기울여 자신의 '너'에게 나아가고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를 자신의 '너'에게 가져가는 사람만이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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