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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세계]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너무 멀리 갔어_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설왕은 2021. 1. 2. 08:55

*** 세 개의 문장으로 고전을 들여다봅니다.

 

 

 

노인과 바다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노벨상 수상작가 헤밍웨이의 대표작이죠. 그리고 다른 유명한 작품들보다 훨씬 짧아서 읽기도 수월합니다. "해는 다시 떠오른다", "무기여 잘 있거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읽기 시작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고등학교 때 읽었는데요. 내용은 전혀 생각이 안 나고 그 책을 읽었던 기억만 납니다. "노인과 바다"는 읽지도 않았는데 줄거리를 알고 있습니다. 워낙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작품이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읽지 않는 작품이죠. 내용을 다 아는 소설을 읽는 것은 그다지 흥미로운 일이 아닙니다. 

 

줄거리는 한 문장로도 요약할 수 있습니다. "노인과 바다"는 산티아고라는 노인이 각고의 노력 끝에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물고기를 배에 묶어서 돌아오다가 상어들의 공격으로 물고기의 잔해만 남긴 채 모두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한 나이 든 어부의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을 쓴 것인데요. 나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인 셈이죠. 그리고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줄거리를 알고 있는 소설을 읽을 때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게 나쁜 점이기도 하지만 좋은 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냥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읽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주인공의 심정이 어떤지 집중하면서 읽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세 개의 문장입니다. 

 

 

1. "단지 내가 너무 멀리 나갔던 탓이야."

 

머리와 꼬리, 그리고 뼈다귀만 남은 물고기를 가지고 자신의 마을 항구에 돌아온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소회입니다. 노인은 죽을힘을 다해서 귀환합니다. 그 와중에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지키려고 했지만 상어에게 완전히 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익숙한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신세한탄을 하거나 물고기를 뜯어먹은 상어를 원망하기보다는 멀리 나갔던 자신의 행동 자체가 잘못이었음을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이 문장 바로 앞에 문장은 이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 물고기 때문에 산티아고는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를 완전히 다 빼앗기고 집에 돌아오니까 오히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항구에 도달했을 무렵에 산티아고는 바람에게 감사하고 또한 침대가 자신의 훌륭한 친구임을 깨닫습니다. 바람 덕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고 이제 침대에 누워서 편안하게 잘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죠. 바람도 친구고 침대도 친구인데 그것은 자신의 일상에 늘 존재하는 친구들인데 산티아고는 왜 자신이 이렇게 지친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큰 물고기 때문에 지쳐 버린 것인데요. 바람과 침대와 비교하면 물고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바람과 침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죽을 정도로 지친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물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고기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이 너무 멀리 나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나가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미끼를 문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산티아고 자신이었던 것이죠. 어부에게 큰 물고기는 유혹거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과 바꿀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면 중간에 낚싯줄을 끊는 것이 옳았습니다. 노인은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너무 멀리 나가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죠.  

 

 

2. "자기 자신과 바다를 상대로만 말을 하다가 진짜로 얘기를 나눌 상대가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말이다."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중간에 계속 들었던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어떻게 이렇게 계속 혼잣말을 하실까?' 정확하게 말하면 혼잣말은 아니라 대상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대상들은 다 말을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노인은 바다와도 말씀을 나누시고 물고기와도 계속 말씀을 나누시죠. 심지어는 물고기를 잡다가 쥐가 난 자신의 왼손과도 계속 대화를 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노인이 되면 이렇게 말을 할 수 없는 것들과 대화를 하게 될까?'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원래 이렇게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산티아고도 응답이 없는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힘들고 재미없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 수 있었습니다. 노인과 바다에는 노인의 친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소년이 나옵니다. 노인이 집에 머무는 소설의 처음과 끝에서 그 소년은 노인의 시중을 들어주기도 하고 돌봐주기도 하고 좋은 이야기 상대가 되어 줍니다. 그래서 저는 헤밍웨이가 이 소설의 제목을 "노인과 소년"으로 할 생각도 잠깐은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소년이 꽤 비중 있는 조연으로 나오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노인은 소년과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깨닫는 내용까지 나오니, "노인과 소년"으로 제목으로 발표되었더라도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람이 혼잣말을 할 수도 있고 생명이 없는 것들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지만, 사람은 사람과 대화할 때 가장 즐겁습니다. 

 

 

3. "먼저 빈틈이 없어야 해."

 

노인은 자신이 운이 없다고 계속 말을 합니다. 운이 없어서 물고기를 잡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소년에게도 그렇게 말을 합니다. 하긴, 바닷속에 있는 물고기를 잡는데 운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런데 운이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운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규명합니다. 그런데 또 혼잣말을 하는데요. 오늘은 운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니까 말이죠. 재수가 좋을 때 그 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노인은 빈틈이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빈틈이 없이 준비가 되어 있어야 운이 따를 때 그 운을 꽉 움켜쥘 수가 있다고 말이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좋은 삶의 자세입니다. 운이 없어서 그동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오늘은 다를 수 있다는 삶의 자세도 좋고요. 오늘 운이 좋다면 그 운을 잡기 위해서 빈틈없이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삶의 자세도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결국 노인은 그 운을 잡았죠. 물론 그가 잡은 운 때문에 그의 생명을 잃을 뻔하기도 했지만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그의 준비 자세도 아주 좋았습니다. 만약 이런 자세가 없었다면 노인은 5미터가 넘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고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겠죠. 어떤 일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서 좋은 성과를 낼 때 성취감과 더불어 삶의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엄청난 것은 사실 별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그러나 그것을 쟁취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별것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하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빈틈이 없는 자세는 중요합니다. 그래야 오늘을 성실하게 살 수 있고 운도 잡을 수 있고 성과를 얻었을 때 깨달음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고 패배감을 극복하는 불굴의 사나이의 이야기로 읽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잔해만 남은 물고기를 실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문장은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입니다. 하지만 저는 "노인과 바다"를 통해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너무 멀리 가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네요. 그리고 역시나 사람에게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노인에게 큰 물고기는 위험한 야망이고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것이었죠. 그의 삶의 진정한 벗은 물고기가 아니라 소년이었습니다.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또 한 번 느꼈습니다. 고전은 고전이다, 라고 말이죠. 특별히 20세기 초중반의 작품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아주 진중하게 다루는 것이 많습니다. 인간은 생명에 위협을 느낄 때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답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래서 좀비와 괴물과 악귀가 나오는 드라마, 영화, 소설은 단순히 흥밋거리가 아니라 사람과 인생이 무엇인지 답을 내놓아야 하는 문제작들이죠.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가 일어났던 20세기 초중반에는 소설에 좀비와 괴물과 악귀를 불러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들이 이미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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