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노트

[웨슬리신학] 믿음이란 무엇인가?_그리스도를 발견하다

설왕은 2020. 8. 24. 23:34

존 웨슬리는 18세기의 사람입니다. 1703년에 태어나서 1791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보통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출발점을 슐라이어마허로 보기 때문에 아마도 웨슬리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시작되기 바로 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1768년에 태어나서 1834년에 죽었습니다. 웨슬리가 살아 있을 때는 슐라이어마허가 학문적 성과를 내기 이전이었으니까 웨슬리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목회와 선교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그 이전의 신학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따라서 웨슬리의 신학은 현대 신학 이전 신학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

웨슬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구원을 받고 싶었는데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슬로건이기도 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의로워져야 했는데요. 믿음을 의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죠. 제가 앞부분에 슐라이허마허를 언급한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에서 하나님 이해는 그 이전의 하나님 이해와는 양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다소 만만해지고 편해졌습니다. 그 이전에는 하나님은 아주 무서운 분으로 이해되었거든요. 하나님의 권위는 인간이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좀 더 인간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무서운 아버지보다는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바뀌어갔죠. 그러나 웨슬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유 없이 무서운 분은 아니었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죄를 반드시 벌하시기 때문에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하나님이고 죄에 대해서 반드시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서기 위해서는 죄가 없든가 아니면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죄를 짓기 때문이죠. 아마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세운 도덕적 기준에 맞게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자신이 세운 도덕적 기준도 충족을 시키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신의 기준에서도 자신은 의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어떨까요? 훨씬 더 기준 미달일 것입니다. 그럼 벌을 받아야 하는데요. 벌을 받지 않을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의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이죠. 그래서 믿음이 중요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웨슬리는 믿음을 무엇이라고 이해했을까요? 웨슬리는 처음에는 믿음을 동의라고 이해했습니다. 웨슬리의 믿음에 대한 이해는 점점 더 발전하는데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725년에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적 견해에 관해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믿음은 신념의 한 종류이며 신념은 합리적 근거 위에  선 주장에 동의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합리적 근거 없이 신념이란 없으며, 마찬가지로 믿음도 없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이성으로 충분히 설명되어야 합니다." (러년 "새로운 창조"에서 재인용, 61)

 

이때만 해도 웨슬리는 동의와 믿음을 거의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는 아들의 생각에 오류를 지적하죠. 모든 믿음은 동의이지만, 모든 동의는 믿음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즉 믿음과 동의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고 아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처럼 웨슬리는 처음에 믿음에 대해서 굉장히 냉철하게 생각하고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과 말씀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그것 역시 지적인 동의에 불과했던 것이죠. 마음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웨슬리의 믿음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었던 몇 가지 경험이 있었는데요. 대표적인 두 가지만 들겠습니다. 하나는 웨슬리가 1735년 미국 조지아주로 선교 여행을 떠나는 배에서 웨슬리는 4개월 정도 배를 타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습니다. 웨슬리는 두려움에 죽을 것 같았지만 모라비안 교도들에게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친 듯이 요동치는 뱃속에서도 시편을 찬송하고 기도했는데요.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웨슬리는 2년 정도에 걸친 미국 선교 여행을 완전히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오는데요. 올 때도 배에서 공포에 떱니다. 

 

"나는 인디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메리카로 갔다. 그러나 오! 나는 누가 구원할 것인가? 이 불신앙의 악한 마음에서 나를 건져줄 자는 누구인가? 나는 맑은 여름 종교를 갖고 있다. 나는 위험이 없을 때에는 나 자신을 믿는다. 그러나 죽음의 위험이 가까이 올 때에는 나의 마음은 공포에 빠진다.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할 것인가?"

 

또 하나의 사건은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라비아 교인들의 기도회 모임에서 웨슬리가 겪은 일입니다. 1738년 5월 24일 8시 45분에 웨슬리는 기도회에서 누군가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으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유명한 사건이죠. 웨슬리의 회심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I felt my heart strangly warmed).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1738년 6월 11일에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Salvation by Faith라는 설교를 통해 믿음을 설명합니다. 웨슬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믿음에 대해서 두 가지 커다란 발견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 구원을 받게 되죠. 

 

첫째, 믿음은 마음의 동의, 마음의 반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그에게 믿음이란 지적인 동의에 불과했는데요. 그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 소식에 마음으로 반응하고 마음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지적인 동의와 더불어 마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둘째, 그는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믿음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바로 이 신앙의 대상"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웨슬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서 믿음과 믿음이 아닌 것을 구분합니다. 믿음이 아니면서 믿음처럼 보이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지적하는데요. 단계별로 1단계는 가장 먼 것이고 3단계는 가장 가까운 것이지만 여전히 믿음은 아닙니다. 1단계는 이방인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믿음이고 열심히 찾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믿음이지만 성서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2단계는 악마의 믿음입니다. 하나님도 알고 예수님도 알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관계인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다 알지만 지적으로 냉철하게 알 뿐, 마음으로 동의하거나 함께 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어떻게 보면 웨슬리의 믿음은 많은 순간 2단계의 믿음이었던 것이죠. 3단계는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같이 동고동락하고 귀신도 내쫓고 병든 자도 치유했지만 이것 역시 진짜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웨슬리의 기준에 따르면 그의 믿음은 2단계와 3단계를 왔다갔다 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진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믿음은 자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의로워지기 위해서 애쓰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을까요? 내가 나 스스로를 볼 때도 흠이 있고 잘못이 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어떨까요? 우리의 의로움은 더러운 옷과 같다는 시편 64편의 말씀대로 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 흠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의로운 하나님 앞에서 나갈 수 있을까요? 

 

테오도르 러년은 "새로운 창조"에서 웨슬리의 신학을 설명하면서 믿음이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도 아니고 합리적인 동의도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는 관계라고 주장하는데요. (새로운 창조, 76) 러년은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 회심을 비롯한 그의 여러 가지 경험과 사색과 신앙을 통해 그런 믿음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합니다. 

 

믿음이 헷갈리는 이유는요. 첫째, 기독교의 믿음은 완전히 능동적인 것도 완전히 수동적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합리적인 동의를 뜻하는 것인데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믿음은 좀 다릅니다.  믿음을 관계로 보는 러년의 주장이 도움이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관계 개선의 시작과 완성은 완전히 하나님의 주도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거든요. 그렇다고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하나님이 다 하시니까 그냥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될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한쪽이 아무리 관계 개선을 위한 지대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둘째, 기독교의 믿음은 최소한 삼각관계입니다. 보통은 누가 누구를 믿는 상황에서는 두 사람만 있으면 되는데요. 기독교는 나와 하나님, 그리고 꼭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좀 더 복잡하죠. 그렇다면 더 간단하게 예수님만 믿는 걸로 생각해 보죠. 그래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더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믿음은 설명되지 않습니다. 

 

좀 더 쉽게 풀어서 말하면 웨슬리가 이해하는 믿음이란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미신 손을 꼭 잡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관계는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참고문헌

테오도르 러년, "새로운 창조"

케네스 콜린스, "존 웨슬리의 신학"

웨슬리 설교전집

위키백과 "존 웨슬리"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