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노트

[웨슬리신학] 구원의 직접 증거가 있을까요?_성령의 증거 II

설왕은 2020. 11. 10. 13:24

존 웨슬리, "성령의 증거 II", 웨슬리설교전집 1권 (대한기독교서회 출판)

 

죽어 봐야 구원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고요? 아닙니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성령의 증거 II"에서 구원의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고 말합니다. 

 

웨슬리의 "성령의 증거"라는 제목으로 이미 1746년에 설교를 작성하고 출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제목으로 1767년에 설교를 했습니다. 웨슬리가 1703년에 태어났으니까 예순네 살에 한 설교입니다. 처음 "성령의 증거"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을 때도 마흔세 살이었으니까 젊은 나이는 아니었는데요. 40대에 한 성령의 증거 설교와 60대에 한 성령의 증거 설교는 좀 다릅니다. 일단 나중에 한 설교가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 있고요. 그리고 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에 대한 초점도 아주 잘 잡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첫 번째 한 "성령의 증거" 설교는 행위를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설교 제목이 "성령의 증거"인데 무엇에 대한 성령의 증거인지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설교를 하게 된 구체적인 맥락이 있었을 것 같고요. 그 상황 속에서 "성령의 증거"를 언급하게 된 것 같습니다. 무엇에 대한 성령의 증거냐면, 바로 구원에 대한 성령의 증거를 의미합니다. 혹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한 성령의 증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같은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말이 그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설교는 구원에 대한 성령의 증거에 대한 설교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신자가 구원받았는지 판가름할 수 있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설교입니다. 

 

웨슬리에 따르면, 구원의 증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 증거이고 다른 하나는 간접 증거입니다. 직접 증거는 성령의 증거, 하나님의 영의 증거이고, 간접 증거는 우리 영의 증거입니다. 

 

성령의 직접 증거는 내적 인상으로 주어진다

웨슬리는 직접 증거의 성격과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현상을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웨슬리는, 직접 증거는 "내적 인상"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웨슬리는 내적 인상 inward impression 이라는 말이 성령의 직접 증거를 표현하는 최상의 말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여러 해 전에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성령의 직접 증거를 언어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을 20년 이상 찾았는데 결국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했고 그나마 최선의 표현이 "내적 인상"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적 인상을 달리 말하면 마음속 깊숙한 곳에 주어지는 느낌 정도라고 설명할 수 있을 텐데요. 증거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모호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증거라는 것은 타인에게 꺼내 보일 수 있도록 명확한 것이어야 하는데요. 마음속 깊은 곳에 느낌이 확실하게 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증거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느낌 feeling 보다는 내적 인상 inward impression 이라는 좀 더 멋있는 말로 성령의 직접 증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슐라이어마허가 종교란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과도 비슷합니다.

 

 

내적 인상이 성령의 직접 증거라니, 다소 실망스럽기는 합니다만, 일리가 있기도 합니다. 사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마음의 확신 혹은 마음의 충격이라고 할 수 있죠. 아무리 외적인 증거가 넘쳐난다고 하더라도 마음으로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외적인 환경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데요. 사람이 변하게 되는 때는 마음에 심한 충격을 받을 때입니다. 그때는 사람이 변하기 시작하죠. 만약에 성령이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물리적인 충격이나 외형적인 변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내적인 변화에 의한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웨슬리는 성령의 증거는 내적 인상이며, 따라서 외적 음성이나 내적 음성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웨슬리의 이 주장이 우리가 기억할 만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직접 증거로 외적 음성이나 내적 음성을 구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웨슬리의 말을 그대로 옮겨 보면요.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어떤 외적 음성으로 이를 증거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내적 음성으로 증거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그렇게 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항상 사람의 마음에 특정한 성경 말씀을 주셔서 지시하신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종 그렇게 하시기도 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영향이나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강한 작용을 통해 영혼 위에 역사하셔서 폭풍과 성난 물결은 지나가고 아주 잔잔해지며, 마음은 예수님의 품 안에 있는 것처럼 안정되고,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모든 악에서 용서받고 죄는 가리어졌다는 것을(시 32:1, 롬 4:7) 분명히 확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내용이 마음에 들어요. 우리는 성령의 직접 증거가 우리의 귀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나 혹은 마음에 직접 말씀하시는 성경 구절과 같은 것으로, 아니면 방언과 같은 은사로 생각할 때가 많은데요. 이런 것들은 다 우리의 말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외적 음성이나 내적 음성으로 성령의 증거가 주어진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무엇이라고 말씀하셨어, 하고 사람들에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혹은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도 타인이 진위 여부를 가리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간에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웨슬리는 그런 것이 성령의 직접 증거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증거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한 가장 내밀하고 깊숙한 것은 인간의 언어로 붙잡아 낼 수 없기 때문이죠. 성령의 증거는 단지 내적 인상으로 우리의 내면에 깊숙하게 찍어지는 하나님의 발자국 같은 것이지만 너무 확실해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웨슬리가 말하는 내적 인상이 바로 이런 것인데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성령의 직접 증거를 현대신학으로 풀어낸다고 하더라도 "내적 인상"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적 인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한 사건

다행히 성령의 내적 인상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아주 다행이죠. 왜냐하면 내적 인상이 내적 인상으로 끝난다면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습니까? 태평양 바닷속에서 거대한 혹등고래가 헤엄치고 다녀도 수면 바깥에서는 구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태평양에 혹등고래가 들어왔을 때 일종의 신호등 같은 것은 켜진다면 금방 알 수 있겠죠. 성령의 직접 증거로 인한 일종의 신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신호를 보고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웨슬리는 성령의 직접 증거로 인해서 발생하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짖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갑자기요. 이성적인 사고의 과정이나 오랜 시간 동안의 연구 혹은 토론의 결과로써 얻어지는 결론이 아닌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듯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까? 웨슬리에 따르면, 우리가 구원받아 거룩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

2.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함

3.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됨

4. 우리가 거룩해짐

5. 우리가 우리의 거룩함을 의식하게 됨

 

1번은 그냥 사실이고요. 2번부터 5번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문제는 2번이 발생하느냐입니다. 그런데 2번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직접 증거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웨슬리는 주장합니다. 성령의 직접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다고 말하죠. 

 

우리 영의 간접 증거

웨슬리는 우리 영의 간접 증거도 있다고 말합니다. 간접 증거는 간단합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를 행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구원의 간접 증거를 보여 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매를 통해서 그 나무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가 곧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웨슬리는 이들의 주장에 반대합니다.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만을 구원의 증거로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한데요.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요.

 

(마 12:33, 개정)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성령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인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가 "성령의 증거 II"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로마서 8장 16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웨슬리는 성령의 직접 증거는 단독으로 언급된 적은 없지만 항상 우리 영의 증거와 함께 쌍을 이루어 언급되고 있는 점을 지적합니다. 성령의 직접 증거가 간접 증거와 더불어 제시되고 있다고 해서 직접 증거가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직접 증거는 간접 증거와 항상 같이 발생한다는 것뿐입니다. 

 

간접 증거가 없다면 직접 증거도 없다

직접 증거와 간접 증거를 나누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웨슬리는 이렇게 구분하는데 전문가인데요. 웨슬리는 직접 증거와 간접 증가를 나누어서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첫째, 간접 증거가 없다면 직접 증거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열매라는 간접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성령의 직접 증거가 있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라는 간접 증거가 당연하게 나타난다는 것이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다 외우기는 힘드니 세 가지만 기억합시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신자의 삶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성령의 직접 증거가 없는 사람으로 판단해도 됩니다. 물론 성령의 열매는 일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웨슬리는 그때를 "흑암의 때"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곧 회복된다고 말하죠. 즉 어떤 사람의 삶을 오랜 기간 동안 잘 살펴보면 그 사람이 구원받았는지는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열광주의자들은 간접 증거 없이 하나님의 직접 증거만을 내세우며 구원에 대해 말합니다. 하지만 웨슬리의 주장에 따르면 열광주의자들이 말하는 열매 없는 구원의 확신은 심각하게 의심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간접 증거가 있어도 직접 증거가 없을 수 있다

웨슬리가 직접 증거를 강조하면서 도달하는 두 번째 결론입니다. 둘째, 간접 증거는 있어도 직접 증거는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있어도 성령의 직접 증거는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성령의 직접 증거 없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상상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자신의 존재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열매가 아닌 자신의 상상으로부터 나온 허구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기 때문이고요. 하지만 웨슬리는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어떤 사람에게서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헷갈리는데요.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를 해봅시다.

 

1. 간접 증거가 없어도 직접 증거는 있을 수 있다. (구원 여부를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2. 간접 증거가 오랫동안 관찰되지 않는다면(제 생각에 최소 몇 년 정도), 직접 증거는 없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3. 간접 증거가 있어도 직접 증거는 없을 수 있다. 

 

한 가지 더 첨가를 하겠습니다. 

 

4.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수시로 부른다고 하더라도 간접 증거가 없다면, 직접 증거는 없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수시로 찾으면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어서 4번을 첨가했습니다. 

 

웨슬리의 요점

이 설교에서 웨슬리가 강조하는 것은 성령의 직접 증거는 있다는 사실입니다. 간접 증거보다 직접 증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8세기는 합리주의, 계몽주의의 시대였기 때문에 웨슬리는 직접 증거를 더 강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합리적인 이성만으로 신앙을 다 설명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웨슬리는 당당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직접 증거를 부인하고 간접 증거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선한 행위를 발견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 의롭지 못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람이라고 판단한다면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칭의의 구원은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웨슬리는 힘을 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적 인상을 통한 성령의 직접 증거는 흙 속에 심긴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 그 씨앗에서 아직 싹이 트지 않았다면 겉으로 봐서는 흙 속에 씨앗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직접 증거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성령의 직접 증거는 성령의 열매라는 간접 증거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직접 증거, 내적 인상이라는 씨앗은 싹이 늦게 틀 수도 있고, 성장이 더딜 수도 있고, 중간에 성장을 잠시 멈출 수도 있습니다. 열매를 맺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단지 성령의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웨슬리가 말하는 직접 증거는 성령으로 인해 주어지는 내적 인상이면서 동시에 거듭남을 의미하고, 또한 이 직접적인 증거는 존재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마음의 변화나 감동 정도로는 설명이 안 되는 새로운 존재의 탄생이 믿는 자 안에 발생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의 변화가 외부에서 관찰될 수 있게 발생하거나 뚜렷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변화에 대한 증거는 사실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죠. 타인을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는 성령의 열매가 진짜 성령의 열매인지 아니면 웨슬리의 말대로 상상의 산물인지 겉으로 봐서는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령으로 인한 존재의 변화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자기 자신의 경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리는 예순 살이 넘어서야 성령의 직접 증거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이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 변화가 아주 더뎌서 짧은 기간 동안에는 관찰할 수 없을 뿐입니다. 왜 제가 그렇게 생각하냐면 제가 오랫동안 관찰하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은 바로 저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이 변화는 어떻게 시작되었냐면요. 웨슬리가 설명한 대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성령의 내적 인상과 같은 것이 있었다고 강하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정통주의 신학 시대의 끝자락에 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정통주의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를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그리고 웨슬리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쓴 글과 설교를 읽어 보면 그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신학을 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현대신학은 신학이 합리주의적 관점에 머물러 있는 것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합리주의적 이성으로 세상과 인간을 모두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는 합리주의가 절정에 치닫고 있는 시점에서 현대신학의 서막을 준비한 사람으로 칭송받을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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