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노트

[웨슬리신학] "값없이 주시는 은총"_하나님은 사랑이래니께

설왕은 2020. 10. 9. 20:46

 

값없이 주시는 은총은 웨슬리가 36살 되던 해에 작성하여 출판한 설교입니다. 1739년에 출판한 설교인데 올더스게이트에서 회심했을 당시가 1738년 5월 24일이니까 회심한 이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작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웨슬리 설교 전집에 나온 해설을 보면 이 설교는 상당히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던 것을 웨슬리도 알고 주변 사람들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이 설교에서 예정론 교리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칼빈주의자 즉 장로교 쪽 사람들과 마찰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웨슬리가 아직 젊었기 때문에 좀 더 용기 있게 이 설교를 출판한 것이 아닌지 추측해 봅니다. 그리고 설교를 읽어 보면 웨슬리가 화가 난 듯한 느낌을 주는 문장이 꽤 있습니다. 아마도 이 설교를 꼭 출판해야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일깨워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글을 쓰고 설교를 하고 출판을 한 것 같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서 웨슬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아주 명료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으로서 모든 이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논리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에 대해서 구분을 좀 해야 할 필요성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베풀 수 있는 모든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주느냐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은혜는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웨슬리는 그 은혜는 모든 사람이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은혜, 은총을 구분하자면 여기에 해당하는 은혜는 선행은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이 보통 값없이 주어지는 것을 칭하지만 "값없이 주시는 은혜" 설교에서 말하는 은혜는 선행은총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맞습니다. 

 

Image by PIRO4D from Pixabay  

 

원죄로 인해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이 타락했지만 그래도 선한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야 개과천선의 여지가 있는 것이지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웨슬리나 칼빈주의자들이나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죄와 전적 타락으로 인해 자력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만이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실까요, 아니면 일부 사람들만 구원하기 원하실까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대답은 너무 뻔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겠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실 테니까요. 웨슬리는 이런 관점에서 은혜를 이해하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세기의 그리스도인은 대부분 하나님의 전능함을 믿었고, 그들이 이해하는 전능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사람들을 보면 구원받은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거든요.

 

다시 정리해 보면요.

 

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2. 하나님은 전능하다.

3.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그런지 이에 대한 대답을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대답은 다음과 같을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2.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다. 

3.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의 입장을 살펴보면 이들이 어떤 대답을 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3번을 선택했습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에 반하여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1번을 선택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칼빈의 예정론, 특별히 이중예정론은 1번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사랑하시고 어떤 사람은 미워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이끄신다는 것이지요. 이중예정론이 의미하는 바는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이중예정론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하면요. 예정론 중에서 매우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교리입니다.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택해 놓으셔서 자신의 주도적인 능력으로 그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이론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닌 사람이었는데요. 그런 바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요. 사도 바울의 관점에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리 택하셔서 구원해 주셨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볼 때도 그런 것 같고요.

 

그런데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구원해 주셨는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물어보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중예정론으로 가기 쉽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할 수 있는 간단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셔서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죠. 이중예정론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 모두를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미리 선택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정론에 대해서는 큰 반감이 없었지만 이중예정론은 좀 달랐습니다. 웨슬리와 같이 강하게 반발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이중예정론은 칼빈의 교리 중 가장 많은 공격을 받는 교리입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감사와 감동으로 인한 자기 고백적인 교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중예정론은 인간의 최종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죠.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기독교의 대전제를 부인하고 있는 것인데요. 이중예정론이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이중예정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이에 대해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웨슬리의 주장은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웨슬리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사실 하나님의 전능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18세기 당시에는 그랬다는 것입니다. 다소 파격적으로 들렸을 수 있습니다. 현대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조짐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전능하다는 것은 건드릴 수 없는 대전제였습니다. 그런데 웨슬리의 주장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해 다소 균열을 일으킬 만한 주장이었죠.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이해될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죠. 인간이 협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웨슬리는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웨슬리의 구원론은 이런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충분히 공격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웨슬리가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서 예정론에 반박하는 근거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제가 볼 때 가장 큰 이유는 이중예정론이 맞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기독교의 가장 큰 계시를 무너뜨린다는 것이죠. 그 외에 웨슬리가 제시한 이유 중에서 세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정론이 맞다면 설교하고 전도하고 선한 일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모두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도를 하든지 말든지 하나님께서 구원할 사람은 구원하고 멸망시킬 사람은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도 필요 없습니다. 설교를 듣고 회심하는 것은 구원과는 상관없는 일이지요. 어차피 구원받을 사람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선한 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악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구원받을 사람은 그저 구원받을 테니까요. 

 

둘째, 예정론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안감을 줄 수 있습니다. 웨슬리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교리는 기독교가 주는 행복, 곧 신앙의 위로를 소멸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p.245, 웨슬리 설교전집 4권)

 

사람이 열심히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다가도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예정론을 믿는 사람은 이때 다시 일어서기보다는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아, 나는 구원받도록 선택받지 못한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불안해지는 것이죠. '구원받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원래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었나 보다' 하면서 절망에 빠지는 것이죠. 

 

셋째, 예정론이 맞다면 하나님을 악마보다 더 나쁜 존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마보다 더 거짓되다는 것은, 악마는 비록 속이는 자이기는 하나,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적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p.254, 웨슬리 설교전집 4권)

 

만약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사실은 구원받을 사람, 구원받지 않을 사람을 미리 정해놓으셨다면 성경은 대사기 문서라고 할 수 있죠. 만약 예정론이 맞다면 하나님은 악마보다 더 비열한 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분명히 예정론을 의미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참다운 의미가 무엇이냐"고 당신은 반문할 것입니다. 만약 내가 "나는 모르겠노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얻을 게 없을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당신이나 나나 사망을 삼키고 이길 때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p.255, 웨슬리 설교전집 4권)

 

성경에는 사실 서로 충돌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일부 구절만 인용하면서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학자나 목회자라면 성경을 통해 자기 신학을 확립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웨슬리가 파악한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죠. 이 계시에 어긋나는 주장은 성경에서 근거가 될 만한 백 개의 구절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 웨슬리의 입장이었습니다. 

 

웨슬리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선행은총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고 구원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선행은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선행은총으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행은총은 단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선행은총이 임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 되는 것이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에게는 죄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행은총이 임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책임을 질 수 있고 져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예정론, 특별히 이중예정론의 주장대로라면 영웅도 하나님이 만들지만 악당도 하나님이 만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뿐만이 아니라 보통의 그리스도인도 그런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총"에서 웨슬리가 주장하는 선행은총의 의미를 두 가지로 정리하면요. 

 

첫째, 웨슬리는 선행은총을 통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기독교의 대전제를 보존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웨슬리의 선행은총 이론은 현대신학의 경향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웨슬리는 인간의 상태에서 대해서는 정통주의 신학적 관점을 유지했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을 통해 현대신학의 탄생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정론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죠. 그렇다면 예정론은 그냥 틀린 것일까요? 일단, 이중예정론은 문제가 많이 있지만 웨슬리가 우려하는 일은 장로교에서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중예정론은 이론적인 교리일 뿐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중예정론을 확고하게 믿는다면 애써서 전도하고 설교 듣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텐데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교인을 보유하고 있고 전도도 가장 열심히 하는 교단은 장로교입니다. 이중예정론이라는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중예정론적인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감리교가 더 미온적이죠.

 

예정론이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런 이해가 더 적합한 것 같기도 합니다. 예정론은 신앙을 하나님이 만들어내는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내거나 조작하거나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지요. 신앙이란 마치 번개가 치는 사건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나 의도, 노력과는 상관없이 그냥 일어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인류의 역사상 참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 프란체스코 같은 사람이요. 그런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 그런 참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그리고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날마다 모여서 새벽기도회를 하고 수요 예배, 금요 예배, 주일에도 오전 예배, 오후 예배 이렇게 두 번 예배를 하고요. 여름과 겨울에는 수련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도덕적인 수준은 어떤가요? 비기독교인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선데이 크리스천이 많아서 그렇다고 변명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예배를 참석할 뿐 아니라 예배를 주관하고 수천 명, 수만 명이 듣고 감동하는 말씀을 전하시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모두 참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분들의 노력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분들의 모습이 참그리스도인의 모습인지는 갸우뚱할 때가 많습니다. 노력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면 그분들은 당연히 참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이 인간의 응답으로, 노력으로, 교육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중예정론은 극단적인 요소 때문에 꺼려지지만 예정론 자체는 시사하는 바가 있는 때문에 단순히 내칠 만한 교리는 아닙니다. 

 

이론적으로는 선행은총 이론이 이중예정론보다 더 논리적이고 더 현대적이고 더 기독교적입니다. 하지만 이중예정론에 담겨 있는 신비한 통찰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교리가 옳고 어떤 교리가 틀린지에 대한 논란과 판단을 통해서 누군가를 배제하고 정죄하려는 시도보다는 어떻게 하면 참그리스도인으로 우리 모두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실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교리가 좀 다르더라도 서로 존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른다면 우리는 어느새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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