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노트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고 믿어야 하는 이유

설왕은 2019. 11. 27. 22:43

삼위일체 교리는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결국 성공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열심히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결국 "만약 무엇인가를 완전히 파악했다면, 그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삼위일체는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어떠한 존재도 신과 같은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설명하려는 삼위일체는 정확히 그 지점까지는 가지 못하고 그 주위만을 맴돌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유일신 하나님과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미에 대해서 다니엘 L. 밀리오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P. 144~157)

 

 

1.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삶이 관계 속에서 영위되는 인격적 삶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관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함으로써 홀로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님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는 하나님이셨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있기 전에도 이미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위격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르네상스부터 형성되기 시작해서 근대에 확립된 '독립된 개인'이라는 개념을 위격(person)으로 이해한다면 성부, 성자, 성령을 세 위격으로 구분하는 것은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많습니다. 근대 철학에 따르면 위격은 완전히 분리된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완전히 분리되고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위격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에서 빠질 수 없는 단어가 바로 페리코레시스(상호 내주, mutual indwelling, perichoresis)입니다. 페리(peri)의 의미는 둥글게 움직이는(around)이고, 코레시스(choresis)는 공간을 만들다, 앞으로 나아가다, 포함하다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해석하면 '둥글게 돌아감' 혹은 '회전'을 의미합니다. 다마스쿠스의 요한이 삼위일체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말입니다. 서로 받아들이고 침투하고 내주하고 둘러싸고 춤을 추듯 하나를 이루는 것이 바로 페리코레시스입니다. 

 

 

2.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을 통해 이해되는 협력성보다 훨씬 더 깊은 교제 속에서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확증한다. 

 

1번의 진술과 무슨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관계'에 대한 재진술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가지는 관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관계의 의미보다도 훨씬 더 깊은 관계라는 것이지요. 밀리오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두 가지 유비를 설명합니다. 하나는 심리학적 유비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유비입니다. 사회적 유비는 구별된 개인들의 사회성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적 유비는 자아가 기억, 이해, 의지 등을 소유한 자기의식적 주체가 될 때 인격(person)이 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심리학적 유비의 문제는 하나님을 고독한 개별자로 축소시킬 수 있다는 점이고 사회적 유비의 단점은 삼위일체를 완전히 분리된 개별자로 파악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의 삼위일체에 관한 말은 명언입니다. "하나를 생각하는 즉시로 셋의 광채로 둘러싸이며, 셋을 분별하자마자 즉시 하나로 되돌아간다."

 

페리코레시스는 사회성의 측면에서 보면 "환대와 사랑의 춤"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보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위격들의 교제로 이해되는 삼위일체는 동등한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사회의 토대를 놓는다. 여기서는 대화와 합의가 세상과 교회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근본적 구성 요소가 될 것이다."

 

 

3.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삶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며, 이 사랑은 상처 받을 가능성까지도 끌어안는 사랑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3번 진술 역시 1번, 2번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가 실천한 사랑에 집중한 진술인 것 같기는 한데 '관계'를 사랑으로 재진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제가 다음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무엇보다 삼위일체는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삶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56) 삼위일체를 과거에 유행했던 하나의 교리로 생각하고 치워버릴 것이 아니라 지금 역사하는 하나님의 삶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밀리오리는 주장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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