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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세계] 오늘 엄마가 죽었다_카뮈 "이방인"

설왕은 2021. 2. 8. 11:05

*** 세 개의 문장으로 고전을 들여다봅니다.

 

 

 

2020년 9월 10일. 작년 크리스마스쯤에 썼던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나의 감상문을 읽어 보았다. 제목은 "중2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였는데 지금 읽어 보니 카뮈에 대한 나의 평가가 다소 야박했던 것 같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그저 중2와 같은 반항심 많은 사람 정도로 묘사했으니 말이다.

 

나는 카뮈를 좋아한다. 내 블로그의 이름을 Happy 시시포스라고 지은 것도 시시포스 신화에 대한 카뮈에 해석에 의해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카뮈의 대표작들은 이미 읽었지만 앞으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다시 또 읽어 볼 생각이다. 내 생각에 카뮈는 20세기 초반에 사람들이 당면했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지금은 21세기이기 때문에 20세기의 문제에 대해서 작성된 답안지는 지금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은 21세기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20세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외면해 버렸다. 그러면서 그 문제는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아니, 21세기에는 오히려 20세기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더 악화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방향이 잘못된 것 같다. 

 

20세기의 문제는 소외였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문제이기도 했고 실존주의가 주목한 문제이기도 했다. 20세기 철학의 흐름을 한 마디로 하면 실존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실존주의가 파악한 인간의 문제는 소외였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죽음을 향해 내던져진 존재라고 표현했는데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소외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소외된 존재로 태어나고 소외된 존재로 살아가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21세기에 우리가 취하고 있는 방법은 세상이 나를 소외시키지 데 굴복하지 말고 내가 적극적으로 세상을 소외시키는 것이다. 소외를 당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소외를 시키는 방법으로 소외를 극복하려고 한다. 세상을 소외시키고 나만이 중요한 세상이 되면, 내가 나에게 잘해주면 오케이다. 내가 잘 살면 오케이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상관이 없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별 관계가 없고 세상이 나를 소외시키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 우리는 더 외로워졌다. 자살하는 사람은 더 많아지고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그것 역시 우리가 세상을 소외시키는 방법이다. 이 힘들고 어두운 세상에 미련일랑 두지 않도록 우리는 깨끗하게 혼자 살다 혼자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깔끔한 것 같지만 서글프다. 

 

'그러게, 왜 이렇게 힘든 세상에 나를 던져 놓았어? 내가 당하고 살 것 같아? 오히려 내가 세상을 소외시킬 거야. 진작에 좀 잘하지 그랬어. '

 

21세기의 문제 해결 방법은 잘못되었다. 나는 카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절한 고통과 아픔을 겪고 그것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우리가 20세기 초반의 사람들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괴로움과 번민의 시간을 겪은 사람들의 정신적 에너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그 혼돈의 시기에 카뮈의 글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은 이상한 뫼르소 얘기를 왜 읽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돈을 악착같이 모으려는 이유는 사실 단 하나인데, 그것은 바로 구원이다. 사람들은 구원받기를 원한다. 구원이 뭔지 왜 받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구원을 희망한다.

 

사람들이 이방인을 읽은 이유? 이방인이 구원의 메시지를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1. 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방인의 첫 번째 문장이다. 이방인이 처음 나오고 첫 번째 문장을 읽었을 때 독자의 반응은 이랬을 것이다.

 

'너도?'

 

Image by Mojca J from Pixabay  

 

1942년에 나온 이방인.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엄마가 갑자기 죽어 버린 세상을 살고 있었다. 실제 자신의 엄마가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 말이 아니다. 엄마는 삶을 지탱해 주는 최후의 보루, 삶을 편안하게 느끼게 해주는 존재의 근거, 포기와 절망의 반대말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죽어 버린 시대였다. 20세기 초중반은 엄마가 죽어 버린 시대였다. 그것도 갑자기 말이다. 1942년의 상황을 카뮈는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사람들은 첫 문장에서 이미 이방인의 세계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 것이다. 

 

뫼르소는 엄마가 죽었지만 슬퍼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뫼르소가 슬펐는지 슬프지 않았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내가 볼 때는 슬퍼했던 것 같은데, 이방인에서 뫼르소를 심판하는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하니까 아마도 견해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그 당시 시대가 그랬을 것 같다. 엄마가 죽어 버린 시대에 울기 시작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전쟁 때문에 죽고 다치고 쓰러지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정신줄을 놓아버린다면 아무도 그 사람을 잡아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뫼르소는 살아야 했다. 엄마가 죽었지만 그는 살 이유를 찾아야 했고, 더 나아가 행복해야 했다. 삶이 즐겁지 않다면 살 이유가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존재의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방인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카뮈 옆에 앉아서 그의 얘기를 듣기 시작할 것이다. 

 

2. "그때 나는 바깥세상에서 단 하루만을 살았을 뿐인 사람도 감옥에서 백 년쯤은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07)

 

사람에게 가장 적당한 수명은 어느 정도일까? 30년 정도 살다가 죽은 사람에게 우리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고 안타까워하고 불쌍하게 여긴다. 30년 정도는 너무 짧은 것일까? 30년이면 사계절을 30번이나 보내고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만 번 이상 보았을 것이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 키우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우리는 30년도 짧다고 생각을 하지만 100년을 산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통해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늘 아쉽고 슬픈 일이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단 하루만 살 수 있다면 어떨까? 마치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꽃처럼 단 하루만 살 수 있다면 그런 인생은 너무 짧아서 슬픈 인생일까? 

 

Image by S. Hermann & F. Richter from Pixabay  

 

이 문장은 단 하루의 삶에 대한 가치를 논하고 있다.

 

"바깥세상에서 자유로운 단 하루의 삶을 살아도 말이지. 그 하루의 경험만을 가지고 그 경험을 곱씹어 보는 것만으로도 100년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 그 정도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단 하루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수천 가지 경험을 하고 수만 가지 생각을 하고 수억 가지 감정을 느끼지."

 

카뮈가 생각하는 인간의 하루란 이런 것이다. 인간에게 단 하루만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단한 축복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수시로 기억하며 행복해하는 사건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2002년에 월드컵 4강에 올라간 사건을 우리는 두고두고 기억하고 그 과정을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한다. 마치 그런 극도의 행복한 순간에 대한 기억처럼 인간이 누리는 단 하루의 삶의 가치란 100년 동안 매일매일 떠올려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카뮈의 대답은... 하루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3.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 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155)

 

이 문장은 이방인의 거의 마지막 문장이다. 뫼르소가 세상과 화해하는 장면이다. 엄마의 죽음에 왜 눈물을 흘리지 않았냐고 추궁하는 이들에게 뫼르소는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결국 뫼르소에게는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가톨릭 사제는 뫼르소에게 마지막으로 화해를 시도한다. 사제의 입장에서는 뫼르소가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도한 것이었지만 뫼르소는 격렬한 분노로 그 화해 시도를 거절한다. 모든 희망이 다 사라졌다. 뫼르소의 무죄 판결에 대한 희망도 사라지고, 죽음 앞에서 연약해진 영혼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려고 했던 사제의 시도도 완전히 실패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희망이 사라진 순간에 뫼르소는 오히려 마음의 문을 연다. 

 

세상은 뫼르소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세상의 부적응자,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자로,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모든 희망이 사라진 순간, 뫼르소는 깨달았다. 뫼르소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무관심한 것처럼, 세상도 뫼르소에게 무관심했다는 것을 말이다. 뫼르소가 어떻게 슬펴했고, 어떻게 그 슬픔을 극복하려고 했고, 그래서 어떤 일을 하게 되었는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은 관심 있고, 애정이 있는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은 뫼르소에게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뫼르소는 세상과 자신이 닮았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마음을 연다. 동질감을 느낀다. 공감한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누군가와 동질감을 느낄 때 사람은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뫼르소는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이다음 문장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희망을 버린 자가 마음을 여는 신기한 장면이다. 세계 대전을 겪으며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말은 그들에게 더 심한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희망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냐고? 뫼르소는 해답을 찾았다.

 

Image by Wokandapix from Pixabay  

 

덧붙임. 이방인은 당연히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방인을 읽어야 할 때가 있다. 희망이 없다고 느낀다면 그때가 바로 이 책을 펼쳐 들어야 하는 순간이다. 오늘 엄마가 죽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뫼르소가 당신의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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