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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실과 의미는 서로 다른 것이다_알리스터 맥그래스 "우주의 의미를 찾아서"

설왕은 2021. 2. 8. 21:26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우주의 의미를 찾아서"의 중심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실과 의미는 다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책의 제목이 내용을 아주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신학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2000년을 전후로 해서 아마도 가장 많은 글을 쏟아내고 있는 신학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글을 많이 쓰면 역시나 글을 재밌게 쓰는 능력도 더 발전하기 마련이죠. 이 글 역시도 과학과 종교라는 어렵고도 범위가 매우 넓은 주제를 흥미롭고 논리적으로 잘 풀어냈습니다.

 

맥그래스가 쓴 책 중 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이라는 책이 있는데 2016년에 6th edition이 나왔고 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과목 교과서로 자주 이용되는 책입니다. 워낙 정리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를 이해하고 서술하는 재주가 좋은 사람이라서 맥그래스가 쓴 책은 일단 신뢰할 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가 쓴 에세이 형식의 글 중 일부는 유명세를 타고 있어서 그냥 낸 책이 아닌가 싶은 책도 있기는 합니다.

 

 

"우주의 의미를 찾아서"도 그런 에세이집이 아닌가 하고 다소 의심하면서 읽었습니다. 책을 시작하면서 '감사하는 글'에 이 책의 내용은 주로 강연에 사용된 원고를 정리한 것이라는 점을 알려 주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는 계속 의심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1장의 내용이 가벼운 에세이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 의심의 시간이 길었던 것 같습니다. 2장부터는 대체적으로 밀도 있는 내용을 압축적으로 서술한 내용이 많아서 유익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고 맥그래스의 평가와 주장도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익숙한 내용이 많이 있는데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는 C.S. 퍼스가 주장한 귀추법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내용이고 신과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귀추법을 하나의 큰 틀로 제시하면서 전체적인 내용을 구성했습니다. 신을 말하는 데 있어서 연역법이나 귀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다른 접근법이 필요한데요. 귀추법이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귀추법은 말 자체가 익숙하지는 않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종종 쓰기도 하고 주로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방법입니다. 

 

책에서는 귀추법(歸推法, abduction)은 "완전히 확실하지는 않은 것을 전제하고 이 전제로부터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론법"이라고 (아마도 번역자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맥그래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p.28)

 

1.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사실인 C가 관찰된다.

2. 그러나 A가 참이라면, C는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니라) 당연지사일 것이다. 

3. 그렇다면 A가 참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만한 이유가 있다. 

 

귀추법은 가정을 선택하는 추론의 방법으로 여러 개의 가정 중 그 가정이 맞는다면 우리의 경험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고르는 논리적 과정을 의미합니다. 귀추법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경험적 적합성'입니다. 귀납법은 수많은 예를 통해서 결론을 도출해내는 방법이고 연역법은 전제를 근거로 논리적인 추론을 진행하는 방법이죠. 귀납법은 수많은 B를 통해서 A라는 결론을 유추해내는 방법이고 연역법은 A라는 결론을 통해서 B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납법이나 연역법은 A와 B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귀추법은 A와 B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맥그래스가 A와 B를 쓰지 않고 A와 C를 써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귀추법이라는 말 자체가 일단 어려워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귀추법 대신에 길더라도 '경험에 따른 합리적 추론법' 정도로 바꾸면 이해하기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Abduction 은 유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일단 경험에서 시작하는 것이죠. 이런저런 경험과 관찰 결과가 있는데 정확히 왜 그런 경험과 관찰 결과가 나오는지 설명할 전제나 가정이 없는 것인데요. 그런데 만약 어떤 전제를 가정해 놓고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의 경험이 매우 잘 설명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 전제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 생각해볼 만한 것 아닌가, 하고 추론하는 방법입니다. 경험에 따른 합리적 추론법입니다. 

 

이 책에는 어쩔 수 없이 대표적인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를 비판한 내용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도킨스가 과학자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고 SF 소설가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맥그래스는 학자로서 상대를 하고 있기는 합니다. 제가 도킨스를 소설가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과학자라면 사실을 언급하고 가치 판단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임을 잘 드러내던가 아니면 가치 판단은 철학자나 신학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과학자의 역할만을 하는 것이 옳을 텐데 자신의 의견이 마치 객관적인 사실인 것처럼, 달리 말하면 과학인 것처럼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인데요. 도킨스와 같은 극단적 무신론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맥그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mage by Ryan McGuire from Pixabay  

 

문제는 새로운 무신론의 열렬한 신봉자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도그마들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내세우면서도, 이것들을 마치 과학인 것처럼 내세우려 할 때 일어난다. (p.150)

 

그런데도 맥그래스가 도킨스를 학자로서 대우를 해 주는 것은 도킨스가 많은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하튼 도킨스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어떤 지점에서 비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을 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고요. 5장 "한물간 어느 무신론자의 생각"과 10장 "생물학 역사에서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에서 도킨스의 주장에 합리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맥그래스는 7장 "기독교의 관점"에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의미 체계의 근간을 잘 서술하고 있습니다. 단지 기독교 신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창조와 구원의 관점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고 세상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근본적인 방향 제시를 해 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관점은 첫째로 우주의 역사는 신의 구원 경륜이라는 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해 준다는 것인데요. 이 책이 제시하는 '의미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굳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우주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설명이 필요하지만, 우주가 존재하게 된 것이 대단히 개연성 낮은 일이었다는 사실에도 역시 설명이 필요하다." (p.145)

 

맥그래스는 우주가 의미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Image by Gerd Altmann from Pixabay  

 

저는 오래간만에 과학과 신학을 연결해서 설명하는 책을 읽었습니다. 과학자들이 맥그래스의 글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볼 때는 매우 균형 잡힌 책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참 어려운 주제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서 항상 과학이 먼저 나오거든요. 그런데 과학은 범위도 너무 넓고 발전 속도도 너무 초고속이어서 과학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벌써 지치는 일입니다. 과학자들도 그렇게 전방위적으로 연구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전문 분야만 파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과학을 연결해서 신학을 거론하려면 과학의 일부분만 보고 말하기는 어렵거든요. 전체적인 큰 그림을 대충이라도 봐야 신학을 말할 수 있는데 이게 너무 힘든 작업입니다.

 

맥그래스의 책을 통해서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서 과학에 너무 방점을 찍어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맥그래스는 이 책에서 신학은 신학의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죠. 그것은 바로 의미를 밝히는 작업입니다. "우주의 의미를 찾아서"는 과학과 신학을 거론하면서 과학과 신학 각각의 역할이 무엇인지 조명해 주는 좋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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