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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믿음은 쉬운 게 아니야_키에르케고르 "공포와 전율"

설왕은 2021. 2. 3. 08:55

쇠얀 키에르케고르/임춘갑 옮김 "공포와 전율" (도서출판 치우, 2011)

 

키에르케고르의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입니다. "공포와 전율"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요. 제목이 무시무시하네요. 왜 제목을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서를 그냥 직역해서 그럴 수도 있는데요. 키에르케고르는 빌립보서 2장 12절에 나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에서 "두렵고 떨림"을 떼어 와서 제목으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말 번역본도 "두렵고 떨림"으로 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 번 읽어봐야지 늘 생각했던 책인데 드디어 오늘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어제 사서 오늘 다 읽었네요. 철학자가 쓴 책이라 쉽게 읽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성경에 익숙해서 빨리 읽을 수 있었고 평소에 궁금하던 이야기에 대한 해설이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만약에 그리스 신화와 파우스트에 익숙했다면 더 쉽게 읽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공포와 전율"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치는 사건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해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내용이죠. 이 일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되었고요.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이 사건을 잠깐 설명하면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습니다. 일부러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임 부부였는데요. 그런데 백 살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게 이삭이고요. 이삭은 별 탈 없이 잘 컸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 가서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듣고 그대로 순종합니다. 삼 일을 걸어서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과 함께 산에 올라갑니다. 칼을 들어서 이삭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막으신 거죠. 마침 수풀에 양 한 마리가 보이고요.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그 양을 희생제물로 바치고 산에서 내려오는 내용입니다. 

 

이 책 전부가 다 그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말로 책의 내용은 255쪽에 달하는데요. 전부가 다 그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왜 제목이 "공포와 전율"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래서 제목이 더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는 게 맞습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문장은 구원을 한 번의 순간에 받고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긴장감을 가지고 날마다 지속적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는 구절이거든요. 이 책의 내용이 딱 그런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두렵고 떨림"이라는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을 텐데, "공포와 전율"이라고 해 놓으니 내용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책의 서언에 보면 키에르케고르의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저 옛날에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그 당시에는 믿는다는 것이 일생을 통한 과제였다. 즉, 믿는다는 멋진 솜씨는 며칠이나 몇 주일 동안에 터득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선한 싸움을 통해서 끝까지 신앙을 지킨 원숙한 늙은 선생은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마음은 여전히 젊었고, 젊은 날에 겪었던 그 두려움과 떨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 두려움과 떨림을 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억제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완전히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약삭빠르게 더욱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듯이 오늘날에는 누구나 더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이 겨우 도달한 바로 그곳에서부터 곧바로 시작하여 더욱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한다. (10-11)

 

 

Image by Lisa Caroselli from Pixabay  

이 내용에서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하고 있는 바는 사람이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일생을 통해서 이루어내야 할 장기적 과제인데 사람들은 너무 단기적인 일로 생각한다고 것입니다. 믿음이 최종 단계여서 평생 노력해도 그 단계에 다을까 말까 한데 사람들은 믿음이 마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그리고 믿음보다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키에르케고르는 그게 착각이고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을 신앙의 첫 단추라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개혁의 영향이죠. 종교 개혁의 슬로건 중 하나가 "오직 믿음으로"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믿음을 강조했죠. 그때부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교리가 가장 중요한 교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제일 중요해진 것이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가톨릭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 여러 가지 어려운 고행과 의식, 절차 등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되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어려운 일들을 수행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구원은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거죠.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닌데 오해의 소지가 상당히 있기는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부분에 대한 지적은 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쉽게 생각한 두 번째 이유는 헤겔의 영향이죠. 키에르케고르는 이 부분을 지적합니다. 18세기는 이성의 시대였습니다. 계몽주의의 시대였죠.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흐름을 주도했던 사람 중 한 명이 헤겔입니다. 헤겔은 진보의 역사를 주장했고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습니다. 헤겔의 사상에 따르면 믿음도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특별한 절차나 행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어느 한순간에 발휘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일종의 지적인 깨달음 정도로 여긴 것이죠. 그래서 잘 이해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일단 깔고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에 반대합니다. 믿음은 평생 노력해야 도달할까 말까 하는 신앙의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생기죠.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믿음을 갖는 것이 평생 노력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노력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낭패죠. 구원에 대한 이해부터 다시 점검해봐야 합니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너무 미래에 국한시켜서 생각합니다. 구원을 사후의 일이라고 여기는 거죠. 구원을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그것부터 해결해야 하는 건데요. 그 고정관념을 벗어나야 키에르케고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로 그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구원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현재에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구원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느냐가 구원의 의미이지 죽고 나서 어떻게 될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단계에 이르려면 평생 노력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구원이 뭔데, 라고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데요. 키에르케고르는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찾아보면 설명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게 중심 내용은 아닙니다. 대신,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거죠.

 

"너, 아브라함처럼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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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던 것 같은 행동을 너도 할 수 있냐고 사람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인정하는 믿음의 행동이거든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은 이런 것입니다. 

 

"네가 아브라함처럼 할 수 있다면 너는 믿음을 가진 거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어떻게 아브라함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걸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걸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8세기에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는 그걸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인즉슨, 믿음은 이성적으로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성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면 머리가 좋고 이해가 빠른 사람은 금방 도달할 수 있는 것인데요. 그렇지 않다는 거죠. 아브라함은 100세가 훨씬 넘어서야 그 믿음의 단계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니까 도달했던 것이고요. 대부분의 사람은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죠. 그런데 우리는 이성적으로 아브라함의 행동을 이해하고 한순간에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요? 키에르케고르가 코웃음을 칠 말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가 없고, 다만 아브라함을 찬양할 뿐이다. (229)

 

아브라함의 믿음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대할 때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는가, 하고 궁금해하고 따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찬양하죠. 그게 부활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믿음 사건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가질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사건은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고 모방할 만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 사건을 어설프게 모방했다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미치광이 살인자가 되는 겁니다. 

 

Image by Jeff Jacobs from Pixabay  

 

키에르케고르는 비극의 영웅과 믿음의 기사를 대조해서 설명합니다. 비극의 영웅은 보편적인 원칙이나 윤리적인 원칙을 지키는 보편자이지만,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아브라함은 개별자로서 행동하고 보편적인 것의 위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혹은 자신의 아들을 죽이면 안 된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죠. 개별자로서 믿음의 행동을 할 때 윤리적인 목적론이 정지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게 도대체 뭐냐?"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이 질문에 일목요연한 논리적 답변이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것과 같은 명령을 우리가 받는다면 우리는 이 명령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명령이니까요.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여러 번 주지시킵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황이 희한하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고뇌와 불안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비극적 영웅을 어떻게 비평하였을까? 사람들은 그를 위대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를 찬양했다. 그리고 저 존경할만한 귀족들의 모임은, 과거의 세대를 심판하기 위해 각 세대가 구성하는 저 배심원들은 역시 같은 비평을 했다. 그러나 아무도 아브라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라도 그는 무엇을 완수했다는 것일까? 그는 끝까지 그의 사랑에 충실했다. (p.246)

 

Image by Pezibear from Pixabay  

 

이 주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동은 결국 하나님과의 사랑에 충실한 행동이라는 것인데요.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번에 끝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지속적인 노력을 끝까지 기울이는 사랑이, 충실한 사랑이겠죠. 그런 사랑의 행동은 신비한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고뇌를 이해할 수가 있다. 나는 아브라함을 찬양할 수가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고 경솔하게도 개별자가 되어 보겠다는 유혹을 받을 사람이 생기지나 않을까 싶어 근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 나는, 내가 개별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용기가 없다는 것도 인정하고, 비록 어느 날엔가 내가 거기까지 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는 온갖 전망을 기꺼이 단념한다는 사실도 고백하는 바이다. (p.234-235)

 

믿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처럼 할 수 없다면 감히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과연 그 단계까지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그 단계까지 가고 싶은지도 의문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고뇌와 불안의 시간이 닥칠지도 모르니까요. 믿음은 사랑과 용기가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은 믿음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놓는 무서운 책입니다. 제목도 으스스하지 않습니까? 제대로 읽은 사람은 비명을 지를 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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