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소설_그3] 박완서 "그 남자네 집"_첫사랑 그 남자, 사랑은 했니?

설왕은 2021. 2. 1. 08:55

책의 뒤표지에 "생애 마지막까지 직접 손보고, 다듬고, 매만진 아름다운 유작"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 남자네 집"이 무엇이 그리 특별하기에 "그 남자네 집"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었을까, 하고 궁금했는데 책의 중반부를 넘어서야 그 남자가 소설의 화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렸습니다. 그 남자는 이 소설 속의 '나'의 첫사랑입니다. 안 그래도 나는 참 눈치가 없는 사람이구나, 하고 종종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네요.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이것은 과연 소설인가, 수필인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이 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작가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어서 박완서 작가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는데, 이 작품 속의 '나'는 제가 조금 알고 있던 박완서 작가에 대한 정보와 일치했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정말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내용을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이라면, 그 남자는 박완서 작가의 첫사랑이고, "그 남자네 집"은 박완서 작가의 첫사랑에 대한 회고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마 박완서 작가를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은 알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하네요. 그것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고요.

 

보리수 나무 열매 (그 남자네 집에 보리수가 있었다)

 

소설은 현재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설 속의 '나'가 회상을 하면서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왔다가를 반복합니다. 그 남자네 집 근처에서 그 남자를 회상하기 위해 과거로 가는 것이죠. 제가 첫사랑 이야기라고 눈치를 채지 못한 이유는 두 사람의 첫사랑 이야기가 요즈음 사람들의 첫사랑 이야기와는 좀 달랐던 것도 있었고요. 그리고 두 사람이 먼 친척이라고 하고 연상연하 커플이기도 했고 소설 속의 '나'도 그래서 그런지 서로 좋아하기는 하는 것 같았지만 연인이라는 생각을 스스로도 안 하고 있어서 읽는 저도 의심을 안 했습니다. 그리고 더 주목을 끌었던 것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보다는 한국 전쟁 당시 서울의 모습,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랑을 찾기에는 너무 현실이 거칠고 각박한 낯섦이 있어서 두 사람에게 주목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힘든 세상을 살고 있었구나, 하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글을 읽었습니다. 배경이 너무 어둡고 낯설고 무섭기까지 해서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핑크빛 사랑에 눈이 안 갔던 것이죠.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 같아서 그 꽃에 눈이 갔을 수도 있는데 사랑했던 두 사람조차도 자신들의 사랑에 집중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대한민국은 불행과 고통이 일상이 되어 버린 이상한 세상이었습니다. 

 

국가라는 큰 몸뚱이가 그런 자반뒤집기를 하는데 성하게 남아날 수 있는 백성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여 우리는 서로 조금도 동정 같은 거 하지 않았다. 우리가 받은 고통은 김치하고 밥처럼 평균치의 밥상이었으니까. 만약 아무도 죽지도 않고 찢어지지도 않고 온전한 가족이 있다면 우리는 그 얌체꼴을 참을 수 없어 그 집 외동아들이라도 유괴할 것을 모의했을지도 모른다. (p.40)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세상을 보고 있자니 두 사람의 꽁냥꽁냥이 사랑이 아니라 불행을 견디고 살기 위한 일종의 도피처럼 보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다 듣고는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한 것 같다고 고마워했다. 나에겐 그 소리가 박수보다 더 적절한 찬사로 들렸다.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가 아니었을까.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 (p.48)

 

소설 속 박완서에게 그 남자는 시와 같은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이별은 그다지 가슴 아프게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했는지 몰랐죠. 원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인데 말이죠. 마치 죽을 것 같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그 감정이 표현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또 두 사람이 첫사랑인지 몰랐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는 그랬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헤어지는 일이 무슨 큰 대수도 아니었을 것 같아요. 하루아침에 가족이 죽어나가고 끌려가고 누구는 북으로 누구는 남으로 가서 생이별을 하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그깟 남녀 간의 이별이 무슨 큰일이었겠습니까. 누군가 죽는 것도 아니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단지 다소 멀리 떨어지고 오래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가슴 아픈 일에 끼지도 못할 일이었을 겁니다. 

 

소설 속의 박완서가 결혼을 한 이후에 그 남자를 다시 만나거든요.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이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직접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중간에 한참 동안 시장 보고 밥 짓고 반찬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마치 요새 먹방과 쿡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정성 들여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이야기만 보아도 정말 맛있었겠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습니다. 요리는 정성이죠. 글만 보아도 음식 하나하나가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는지 눈에 그려지더라고요. 그런데 소설 속 박완서는 며느리로서 그런 일을 능숙하게 잘 못할뿐더러 시어머니가 워낙 잘하셔서 주로 돕는 역할과 감탄하는 역할만 하는데요. 나중에는 불평도 합니다. 민어를 아무리 맛있게 요리해도 민어는 민어 맛을 벗어나지 못하고, 김치를 아무리 정성 들여 담아도 김치는 김치일 뿐이라고 말이죠. 한참을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남자가 다시 등장하고 소설 속 박완서는 그 남자를 다시 만납니다. 

 

그 남자네 집은 2004년도 나온 작품입니다. 박완서 작가 1931년 생이니까 아마 일흔 살 전후에 이 글을 썼을 것 같습니다. 일흔 살에 꺼내 보는 첫사랑 이야기죠.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남편이 작고한 이후에 글을 쓴 것 같습니다. 아무리 소설이라도 첫사랑 이야기를 이토록 길고 자세하게 쓴다면 좋아할 남편은 없을 거예요. 첫사랑 이야기라 애틋한 부분도 있고요. 위험한 부분도 있습니다. 아마 제가 남편이라면 "이렇게 첫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나랑 살았어?"라고 말하면서 두고두고 괴롭힐 만한 소설이죠. 여기서는 남편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글을 쓰는 작업이 쉽지 않은 나이가 되었는데 꼭 써야 할 이야기로 첫사랑 이야기를 꺼낸 작가의 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배우자와 사별을 하고 자신도 죽음을 생각할 나이가 되었는데 작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런 질문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은 했니?"

 

Image by StockSnap from Pixabay

 

박완서 작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소설가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돈도 모았고 명성도 얻었고 하고 싶은 일도 했는데요. 이 정도면 정말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작가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짜 사랑이었는지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이죠. 그래서 떠오른 사람이 바로 '첫사랑 그 남자'가 아니었을까요? 첫사랑은 대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여운을 남기는 것이 바로 첫사랑입니다. 내가 그 사람과 잘 되었더라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해보는 일이죠.

 

"그 남자네 집"은 소설 속의 박완서가 애틋한 마음으로 평생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첫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감사하며 탐닉하고 있는 건 추억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한가운데 있지 않았다. 행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그와 소원해진 사이에 느낀 휴식감도 절정감 못지않게 소중했다. 긴장 뒤엔 반드시 이완이 필요한 것처럼. 그러나 한 번 통과한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전적인 몰두가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p.72)

 

서로 관계가 소원해진 것에 대하여 작가는 이렇게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소설 속 박완서는 사랑보다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본능적인 감각으로 삶을 선택하죠. 그것은 아마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죽고 나면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냐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선택입니다. 첫사랑이라고 하지만 첫사랑이라고 인식을 하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첫사랑이었다고 다시 명예로운 이름을 붙여 줍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자신이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티를 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첫사랑 따위를 운운하며 좋은 혼인 자리를 놓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바보 같은 행동이었을 테니까요. 그 남자의 어머니에게 청첩장을 전달해 주러 가면서 첫사랑은 공식적으로 완전히 끝이 납니다. 이렇게 밋밋한 첫사랑의 종말이라니. 이래서 저는 이 사랑을 첫사랑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나 봅니다. 

 

왜 그랬을까요? 소설은 나름 그 대답을 내놓습니다. 

 

나는 작아도 좋으니 하자 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에서 알콩달콩 새끼 까고 살고 싶었다. 그 남자네 집도, 우리 집도 사방이 비 새고 금 가고 조만간 무너져 내릴 집이었다. 도저히 새끼를 깔 수 없는 만신창이의 집,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새끼를 위해 그런 집은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p.100)

 

Image by homecare119 from Pixabay

 

 

이렇게 답을 내놓는 것은 사실 더 웃기는 일이죠. 그래서 바로 이렇게 이어서 쓰고 있습니다. 

 

정답이 나오면 비밀은 없어진다. 나는 그렇게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 인생이 살 만한 건 정답이 없기 때문인 것을.

 

아마도 이 앞에 문장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다.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게 정답일 리 없다." 이렇게요. 내 새끼들을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인데, 그런 대답은 비겁하게 들립니다. 

 

이 소설은 "악착같이 살아남았는데 사랑은 했니?"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렇게 길게 길게 그에 대한 답변을 늘어놓았는데요. 소설 속 박완서가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 누구도 다른 선택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떳떳할 수 없는 것은 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다 늙어서 몇십 년 전 첫사랑을 진정 사랑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그게 뭣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결국은 인생의 마지막에 가까이 와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같은 질문을 하게 될까요?

 

Image by congerdesign from Pixabay

 

"그래, 오랫동안 살아남았는데 사랑은 했니?"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랑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게 될 수도 있고요. 아낌없이 계산 없이 사랑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 남자네 집"은 이 질문이 바로 인생의 최종 질문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이 질문에 작가가 답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답을 해야 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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