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노트

[신학노트]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설왕은 2021. 1. 6. 17:03

(창 1:26-27, 개정)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이 창조되었다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사람이 다른 존재와 다른 특별함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일단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어로 형상은 첼렘, 모양은 데무트입니다. 뜻은 한국말도 그렇지만 히브리어도 비슷합니다.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한데 첼렘은 외형, 석고상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에 데무트는 비슷함, 유사함과 같은 의미입니다. 첼렘과 데무트는 그냥 거의 동의어로 비슷함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26절과 27절을 보면 형상이 세 번, 모양이 한 번 나옵니다. 그걸로 봐서는 모양보다는 형상을 더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imago Dei 즉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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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본질을 따라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두 다리와 두 팔과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과 비슷해 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고 듣고 경험할 때 사람과 하나님은 비슷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인데 눈에 보이는 첼렘을 따라 만들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여러 가지로 이해되어 왔는데요. 저는 딱 두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첫째는 이성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이성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입니다. 이성의 의미를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말입니다. 20세기 이후에 이성은 주로 논리적, 분석적 능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논리적으로 똑똑하다는 것이고요.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똑똑하기 때문에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인간의 똑똑함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똑똑함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AI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성의 의미가 많이 축소되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성으로 보는 것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성은 보편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성은 똑똑함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본질이면서 동시에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을 뜻하는 말인 그리스어 로고스(logos)는 이성뿐만이 아니라 말을 뜻하기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고 세상은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이 존재의 근원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은 하나님의 이성이며, 하나님의 이성이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말은 존재의 근원적 구조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인간만이 복잡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도 몇 가지 신호를 보낼 수는 있습니다. 배고프다던가 혹은 먹을 것이 있다던가의 의사소통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야기를 지어낸다는 식의 말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또한 인간은 말을 통해서, 언어를 통해서 존재와 관계를 맺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 동물들이 아담에게 나왔습니다. 그러자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죠. 이름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 주고 그 존재와 관계를 맺습니다. 이런 관계 맺음의 방식은 아담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애완동물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사귐의 관계를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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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존재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근원 구조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런 의미에서 이성이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는 없고 로고스의 또 다른 의미인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이성을 말로 이해한다면 이성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가지는 두 번째 의미는 '관계'입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1장 27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구분해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 그것도 성별이 다른 두 사람으로 지었다는 것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서로 사귀면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신학을 처음 배울 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공부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배웠는데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의 형상이 관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왜 이것을 몰랐을까,라고 생각했는데요. 제가 10여 년 전에 본 몰트만의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에 '관계'라는 단어에 밑줄이 막 그어져 있더라고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저는 분명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는데 그것을 깊이 생각하거나 동의하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갔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형상이 관계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잊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식적인 관점에서 생각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단수로 나왔다가 갑자기 복수로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우리라는 말이 나오고 그다음에 사람은 단수로 나옵니다. 반대로 27절에서는 하나님은 단수로 나오고 사람은 남자와 여자, 이렇게 복수로 나옵니다. 신학자 몰트만은 이 두 구절은 매우 의도적으로 구성이 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고요. 몰트만은 하나님이 갑자기 복수로 '우리'로 표현된 것은 신중함의 '복수'라고 말합니다. 즉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우리도 자기 자신과 말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자기 자신과 인식적 분리를 통해서 신중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지요. 26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식론적인 분리를 통해 우리가 되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존재론적인 분리를 통해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 적어도 세 존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에게 말을 거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 이렇게 세 존재가 나타납니다. 27절도 마찬가지로 세 존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 남자, 여자, 이렇게 세 존재가 나타나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한 개인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의 사귐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몰트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은 고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사람들의 사귐 속에서만 실천된다... 개체화된 개인과 고독한 주체는 사람의 존재의 손상된 방식이다."

-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p. 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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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이 지적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형상은 사귐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이유가 단순히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귐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현하는 기본 전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즉 인간이 단지 동떨어진 개개인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귐과 사랑의 관계를 가지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한다는 것이고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사람을 보면 마치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밀랍 인형을 전시해 놓은 곳이 있죠. 정말 사람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서 실제 그 사람이 옆에 있어도 가만히 있으면 잘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잘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정교하게 창조되었는데요. 사람은 말을 하고 다른 사람과 사귀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발현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정적인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발현되지 않고요. 타인과 사귐으로써 또한 대화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찬란하게 나타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히 결혼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단순히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성별이 나누어져 있는 모든 동식물이 짝짓기를 통해서 자식을 낳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것처럼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사귐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더 좁혀서 말하면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말을 하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타인에게 말을 하고 타인과 사귐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괴테의 "동화"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무엇이 금보다 밝은 것이냐?"라고 왕이 물었다.
"빛입니다"라고 뱀은 대답하였다. 
"무엇이 빛보다 더 신선한 것이냐?"라고 왕이 물었다.
"대화입니다"라고 뱀은 대답하였다.

 

* 참고도서

1.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2. 폴 틸리히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3. 다니엘 밀리오리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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