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베스트문장3] 임철우 "아버지의 땅"

설왕은 2021. 1. 11. 09:00

저는 좋은 한국 소설을 찾고 있습니다. 찾기가 쉽지 않네요. 최근에 인기가 있는 소설은 아무래도 작가의 지명도에 기대어 있거나 사회적 이슈가 된 작품들이 많아서요. 좋은 작가의 작품은 대체로 좋기는 한데 항상 좋은 것은 아니고요. 개인적인 취향도 있으니까요. 아무리 좋은 작가라도 저와는 안 맞을 수 있습니다. 또 요새는 좋은 작품이라서 잘 팔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열심히 팔아서 많이 팔리는 작품이 꽤 있습니다. 마케팅의 승리지요. 베스트소설이어서 읽어 보면 상당히 실망스러운 것들이 많습니다. 또 자극적인 것들이 인기를 끌 때가 많지요. 저도 사람인데 자극적인 것에 안 끌리는 것은 아닌데요. 자극적인 음식은 두고두고 자주 먹을 수는 없는 것처럼 자극적인 작품은 금방 질리기도 하고 곱씹어 볼 만하지는 않아서 별로 손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암사에서 나온 "80년대 대표 소설"을 집어 들었습니다. 책 제목 위에 "평론가 쉰두 사람이 뽑은"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고요. 52명의 평론가들이 80년대 대표 소설을 뽑았는데 물론 사람마다 목록이 다른데요.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이 바로 임철우 작가의 "아버지의 땅"입니다. 80년대가 우리나라 문학사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시기였냐면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박경리의 "토지"가 바로 이 시대의 작품입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중단편들도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겠지요? 그런데 임철우 작가의 "아버지의 땅"이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길래 읽어 보았습니다. 역시나 좋은 문장이 많았습니다.

 

 

베스트 문장 세 개를 뽑았습니다. 

 

3. "쫓겨가는 한 마리 딱정벌레처럼 트럭은 저만치 들판 가운데로 난 황톳길을 따라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땅"의 첫 번째 문장입니다. 글은 첫 번째 문장, 첫 번째 문단이 중요합니다. 첫 문장에서 독자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지 못하면 그 작품은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트럭이 가고 있었다"로 쓸 문장을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 그림이 그려지죠. 어떤 배경 속에 트럭이 있는지 그리고 트럭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문장은 카메라로 보이는 화면으로 치면 광각렌즈를 끼고 보는 것이죠. 넓은 배경으로 화면을 잡고 그 안에 아주 작은 크기로 움직이고 있는 트럭에 시선을 모읍니다. 그렇게 첫 장면을 그리고 있노라면 작가의 설명에 박수를 치면서 동의하게 됩니다. '와, 진짜 딱정벌레처럼 보일 것 같다'고 말이죠.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트럭에 좀 더 다가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게 되죠. 첫 문장이 아주 좋습니다.  

 

 

2.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괴괴한 어둠과 그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솔솔 풍겨 나오는 음습한 곰팡이 냄새는 마치 은밀한 범죄 장면을 숨어 지켜보고 있는 듯한 은근하면서도 유혹적인 두려움과 함께 전신에 아릿한 쾌감과 흥분을 불러일으키곤 했던 것이다."

 

제가 이 문장이 좋았던 이유는 이 문장을 통해서 사람들이 왜 스릴러나 범죄 영화를 보는지 느낌이 왔거든요. 범죄 현장이 두렵기는 하죠. 그런데 사람은 그 현장을 목격하고 싶은 충동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범인인지 어떤 짓을 저지른 것인지 진실을 알고 싶은 거죠. 그러니까 두렵지만 그 장면을 보고 싶은 유혹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 장면을 목격했을 때 두려움과 더불어 흥분감도 느낄 수 있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형용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형용사들이 많이 나왔어요. '괴괴한', '음습한', '아릿한'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정확한 뜻은 잘 모르겠지만 어울리는 느낌이었어요.

 

괴괴하다: 쓸쓸한 느낌이 들 정도로 고요하다는 뜻이고요.

음습하다: 한자의 뜻 그대로 그늘지고 축축하다는 뜻입니다. 

아릿하다: 조금 알알한 느낌이 있다, 찌르는 것처럼 쓰리고 아픈 느낌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대체 불가능하다고 느낀 단어는 '아릿한'이라는 단어입니다. 짜릿한 쾌감과 아릿한 쾌감은 다른 거죠. 짜릿한 것은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자극적이지만 긍정적인 느낌이고 아릿한 쾌감은 통증이 약간 느껴져서 다소 불쾌하지만 그래도 쾌감이 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

 

1. "그리고 항상 누구인가를 겨누고 열려 있는 총구의 속성을, 그 냉혹함을, 또한 그 조그맣고 둥근 구멍 속에서 완강하게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는 소름 끼치는 그 어둠의 깊이를 생각했다."

 

총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죠. 거기서 나오는 총알이 사람에게 박히면 사람이 죽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 총이라는 물건을 중립적으로 객관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냥 총알을 빠르게 쏠 수 있는 장치로 여기는 것이죠. 그러나 총은 냉혹한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총알은 대상이 누군지 어떤 상황인지 총알을 받을 만한 자인지 판단하지 않습니다. 일단 총알이 발사되면 그냥 가서 박히고 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총구를 들여다보면 당연히 어둡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그 가늘고 긴 총구에서 차가운 어두움의 깊이를 발견합니다. 총을 그렇게 무시무시한 것으로 인식한다면 누군가에게 총을 들이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몹쓸 짓을 하는 것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아주 쉽고 단순한 일이지만 그로 인해서 끔찍하게 아프고 복잡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총구를 감정 없이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총이라는 것은 멋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저는 "아버지의 땅"을 읽고 임철우 작가가 쓴 책을 한 권 샀습니다.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세상, 그리고 사람과 화해하려는 그의 철학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허세가 가득하고 무슨 말인지 자신도 잘 모를 것 같은 문장으로 글을 쓰는 작가들도 있는데요. 임철우 작가의 글은 문장도 간결하고 솔직한 것 같아서 작가의 다른 글도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평론가가 추천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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