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다 아는 바보_양귀자 "원미동 시인"

설왕은 2020. 8. 31. 06:36

 

나는 좋은 소설을 읽고 싶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좋은 문장을 읽고 싶어서이다. 내가 읽는 책들은 번역서가 매우 많고 번역서가 아니더라도 문장 자체가 수려한 글을 읽을 기회가 별로 없다. 좋지 않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글을 읽을 때마다 드는 느낌은 처음 가본 동네를 헤매면서 길을 찾고 있는데 길에 지나다니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들 때문에 계속 신경 쓰면서 두리번거리는 기분이다. 매우 불편하다. 생각의 깊이가 있는 책들은 보물이 숨겨져 있는 지도책과도 같다. 잘 보면, 정말 잘 보면 보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보물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의 크기를 알기 때문에 답답함과 불편함을 알면서도 책을 계속 집어 들고 읽게 된다. 그러나 그런 책들은 대개가 불친절하고 문장이 좋지 않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또 하나 드는 느낌은 내가 이런 책을 계속 보면 나도 이런 글을 쓰겠구나, 하는 불안감이다. 그래서 나는 문장을 물 흐르듯 쓰는 소설가들의 문장을 읽는 것이 좋다. 

 

"원미동 시인"에서도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오밀조밀 늘어놓은 온갖 과자와 초콜릿과 사탕이 모두 내 손아귀에 있다, 라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나는 흐물흐물 기분이 좋아졌다." (32)

 

Image by Alexas_Fotos from Pixabay

흐물흐물 기분이 좋아진다는 표현이 마음에 와 닿았다. 흐물흐물이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어울리는 의태어는 아닌 것 같은데 기분이 어떻게 좋아진다는 것인지 너무 공감이 되는 말이다. 이런 문장을 읽는 것이 좋다. 내 기분이 흐물흐물 좋아질 때가 있는데 그때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은 것이다. 

 

둘째, 좋은 소설은 묵직하다. 묵직하다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일단 좋은 소설은 시대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묵직하다. 그리고 시대의 기쁨보다는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을 때가 많다. 시대의 기쁨이야 함께 기뻐하고 끝내면 될 일이다. 하지만 시대의 아픔은 아프고 끝내면 아픔의 원인은 제거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계속 아플 것이고 누군가는 그 아픔을 견뎌야 하고 그 아픔의 이유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누군가는 부끄러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소설은 대체로 묵직하다. 그리고 좋은 소설이 묵직한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을 읽었을 때 내 존재에 남고 내 삶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가벼우면서 묵직한 것...

 

"원미동 시인"도 묵직한 소설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사람은 경옥이라는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이다. 경옥이가 김 반장과 원미동 시인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소설이다. 지금은 워낙 사람들이 개인주의적으로 살아서 동네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예전에는 아니, 지금도 동네라고 부를만한 분위기를 가진 곳에서는 동네에 원미동 시인 같은 사람이 한 명쯤은 살고 있기 마련이다. 원미동 시인은 겉은 멀쩡한데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젊은이다. 이 젊은이는 시를 외우고 다니고 쪽지 같은 종이에게 시를 적어서 읽기도 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한다. 경옥이는 원미동 시인과 김 반장을 대조해서 설명한다. 원미동 시인은 정신이 반쯤은 빠져 버린 젊은이라면 김 반장은 사리분별 잘하고 싹싹하고 자기 앞가림도 잘하는 청년이다. 그래서 경옥이는 마음 한 구석에 김 반장이 자신의 형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었다. 그러나 한 사건이 발생하고 거기서 경옥이는 김 반장과 원미동 시인의 진면모를 발견한다. 원미동 시인은 동네 깡패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었는데 김 반장은 자신이 그 사건에 끼어들여서 화를 당할까 봐 원미동 시인의 도움 요청을 무시하고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한다. 거기서 경옥이는 김 반장의 사람 됨됨이를 간파해 버린다. 그리고 원미동 시인은 분명히 김 반장에게 배신을 당했는데도 며칠 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김 반장의 가게 일을 도와준다. 경옥이는 원미동 시인이 진짜 바보인가, 아니면 기억상실증에 걸렸나 의심하는데... 원미동 시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슬픈 시가 있다면서 경옥이에게 들려준다.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하는 순교자 같다." (42)

 

사시나무

 

그러면서 경옥이는 깨닫는다. 원미동 시인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아니, 다 아는 바보라는 것을. 

 

나는 원미동 시인이 왜 이렇게 바보 같이 살고 있는지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그 단서를 찾아보았다. 

 

원미동 시인의 새어머니가 이렇게 말한다. 

 

"대학 다닐 때까진 저러지 않았대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학교에서 잘렸대나 봐요. 뭐 뻔하죠. 요새 대학생들 짓거린. 그리곤 곧장 군대에 갔는데 제대하고부터 사람이 저리 됐어요. 언제나 중얼중얼 시를 외운다는데 확 미쳐 버린 것도 아니고, 아주 죽겠어요." (30)

 

그리고 이 작품은 1986년도 작품이다. 그러니까 원미동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 당시 대학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과 집안의 뒷받침이 있었다는 것이고. 대학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겠다. 대학에서 퇴학당했고 그리고 군대에 끌려간 것이었다. 그때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였고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썼다. 정의의 편에 선 자들의 승리로 역사가 착착 진행되어 주면 좋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끝까지 정신 차리고 정의를 외치고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포기하거나 변절했을 것이다. 원미동 시인은 끝까지 싸우는 이로 남은 것도 아니고 반대 방향으로 돌이킨 것도 아니라 바보로 남기로 결정한 것이 아닐까? 무슨 이유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는 박해받고 싶은 순교자로 살고 싶었나 보다. 

 

원미동 시인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나는 가끔 살아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때가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토르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 

 

"억세게 운이 좋아서였든 하늘이 도와서였든 그 어떤 연유에서든 다행히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정말로 양심적인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 세상은 정말로 정의를 위해서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은 제명대로 살기 힘든 세상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타협하고 어느 정도는 눈을 감고 모른 척하고 어느 정도는 기회주의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어두운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정말로 양심적인 사람들은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다. 1980년대의 대한민국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어두운 시대였다. 

 

누가 원미동 시인을 욕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원미동 시인을 무시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시대에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경옥이는 일곱 살짜리 어린 소녀이지만 원미동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본다. 

 

소설이란 이토록 가볍고도 묵직할 수 있는 것이다. 

 

* P.S. 원미동을 찾아보았다. 진짜 있는 동네인지... 무진기행의 무진처럼 없는 동네는 아닌지. 찾아보니 원미동은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동네 이름이다. 양귀자 작가가 진짜 이 동네를 배경으로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원미동이 있다니 반갑다. 나중에 찾아보니 실제로 양귀자 작가는 부천시에 원미동에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원미동 시인"도 포함되어 있었을 "원미동 사람들"이라는 연작 소설이 히트를 치고 나서 서울 평창동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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