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전광용 "꺼삐딴 리"_대체로 기회주의자가 살아남는다

설왕은 2021. 12. 8. 16:41

1962년에 발표된 "꺼삐딴 리"는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소설입니다. 꺼삐딴 리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릴 때는 소설을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남이 읽고 평가해 놓은 대로 머릿속에 집어넣었죠. 그래서 꺼삐딴 리는 기회주의자이고 그래서 나쁜 사람 또는 별로 본받을 것이 없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글을 읽고 소화하는 방식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음식을 씹어 먹어야 하는데 남이 씹어서 내 입에 넣어 주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맛도 없고 좋은 기억도 안 남게 되죠. 

 

꺼삐딴 리, 이번에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꺼삐딴 리, 한국어로는 이인국 박사를 과연 기회주의자로 매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둘 중에 하나이죠. 우리가 모두 기회주의자가 되었거나 아니면 이인국 박사의 삶의 방식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 중간 정도일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모두 어느 정도 기회주의자가 되었고, 이인국 박사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자신만의 생존 방법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까요. 지금처럼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신념 따위는 버리는 돌아가는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요? 아니, 기회주의자가 아니라면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꺼삐딴 리가 그의 짧은 인생에서 경험했던 세상의 변화는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에 소련군의 주둔, 한국 전쟁으로 인한 월남, 남한에서는 미군의 주둔,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날아갈 준비를 하며 소설은 끝이 납니다. 21세기도 너무 정신없이 변하고 있어서 어지럽기까지 하지만 그 당시에는 어땠을까요? 그 변화는 빠르기도 했지만 위험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고 있으면 목숨이 달아날 수 있는 변화였죠. 신념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신념을 지킬 생각이라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이인국 박사가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십팔금 회중시계입니다. 

 

그 후 삼십여 년,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이 변하여 갔지만 시계만은 옛 모습 그대로다. 주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은 얼마나 변한 것인가. 이십대 홍안을 자랑하던 젊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머리카락도 반백이 넘었고 이마의 주름은 깊어만 간다. 일제 강점기, 소련국 점령하의 감옥 생활, 6·25 사변, 삼팔선, 미군 부대, 그동안 몇 차례의 아슬아슬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인가.

 

 

이인국 박사에게 그 시계는 여러 가지 추억이 서린 것이기도 했지만 시계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그의 인생 목표인 것 같습니다. 그의 목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죠. 시계가 째깍째깍 작동하면서 살아가듯 자신도 그렇게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인생 뭐가 있어, 살아있고 잘 살면 그만이지라는 이인국 박사의 인생의 모토를 담고 있는 물건이 바로 시계인 것이죠. 그가 기회주의자가 된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인국 박사를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소설의 제목은 꺼삐딴 리일까요? 꺼삐딴 리는 이인국 박사가 소련군에게 잡혀가서 감옥에 있을 때 소련군이 이인국 박사를 불렀던 이름입니다. 이인국 박사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죽을 뻔 했지만 의사로서의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일종의 승부를 겁니다. 스텐코프 장교의 왼쪽 뺨에 붙은 작은 혹을 떼어내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수술이 제대로 안 되면 총살에 처하겠다는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 수술을 집도합니다. 승산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안했겠지만 위험한 도박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해내죠. 이게 바로 그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살아남고 출세하기 위해서 과감하게 승부를 걸기도 하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주변 환경에 적응합니다.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 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 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이인국 박사는 이렇게 혼자 생각합니다. 꺼삐딴 리는 생존을 위한 열망을 통해 그가 획득한 이름입니다. 이인국 박사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저는 꺼삐딴 리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렇게까지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죠. 혹독한 세상이라면 꺼삐딴 리들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꺼삐딴 리와 같은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별문제 없이 살 수 있는 순한 세상이 오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첫 문장입니다. 

 

수술실에서 나온 이인국 박사는 응접실 소파에 파묻히듯이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그를 좋아하거나 존경할 수는 없겠지만, 첫 문장이 말해 주는 바는 이런 것이죠. 

 

그도 힘들었다. 

 


1962년 작품으로 동인 문학상 수상.

 

* 한 줄 줄거리:

외과 의사인 이인국 박사는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이후까지 시대와 상황에 아주 잘 적응해서 살아남았고 부자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잘 살 계획이다. 

 

* 첫 문장:

"수술실에서 나온 이인국 박사는 응접실 소파에 파묻히듯이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 끝 문장

"차창을 거쳐 보이는 맑은 가을 하늘이 이인국 박사에게는 더욱 푸르고 드높게만 느껴졌다."

 

* 보통의 평가

이인국 박사(꺼삐딴 리)는 출세적 세속주의자이면서 기회주의자이다. 

 

* 누가 읽을 수 있는가?

중학생도 읽을 수 있지만 재미가 있을까? 

 

* 생각해 볼 문제

1. 이인국 박사를 기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까?

2. 이인국 박사가 기회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3. 이인국 박사는 앞으로도 잘 살 수 있을까?

4. 이인국 박사는 행복할까?

 

* 소설이 사용한 상징

십팔금 회중 시계

 

* 기억에 남는 부분

"그 후 삼십여 년,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이 변하여 갔지만 시계만은 옛 모습 그대로다. 주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은 얼마나 변한 것인가. 이십대 홍안을 자랑하던 젊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머리카락도 반백이 넘었고 이마의 주름은 깊어만 간다. 일제 강점기, 소련국 점령하의 감옥 생활, 6·25 사변, 삼팔선, 미군 부대, 그동안 몇 차례의 아슬아슬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인가."

 

* 왜 읽어야 하는가?

우리의 아픈 역사와 그 속에서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