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하늘의 별은 땅 위의 이슬과 같다_황순원 "별"

설왕은 2021. 2. 2. 10:06

한국 근현대 소설은 참 우울합니다. 신나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전후의 전쟁 같은 삶. 문학은 인간의 상상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니까 현실의 암울함을 훌쩍 털어버릴 만한 작품이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차라리 두 발을 다 현실 안에 제대로 내리고 나온 작품이라면 당시의 아픔을 간접적으로라도 제대로 경험할 수 있을 텐데, 일제강점기 시대의 작품은 그마저도 불가능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압제자는 없는데 사람들의 삶은 모조리 비참하죠. 괴롭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스스로 어디가 모자라서 괴로운 것처럼, 가해자 없는 피해자들의 비참함을 글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것이 즐거울 턱이 없습니다. 

 

Image by Pexels from Pixabay

 

황순원의 "별"은 1941년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80년 전 작품이니까 꽤 오래전 작품이네요. 이 정도 시대 간극이 있으면 촌스러울 가능성도 높고 공감을 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단 일제강점기에 나온 작품에 손이 잘 안 가는 이유는 '또 슬픈 얘기겠구나'라는 짐작 때문이죠. "별" 역시나 전체적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별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결심을 한 이유는 알퐁스 도데의 "별" 때문이었습니다. 일종의 대결을 해 보고 싶었어요. 알퐁스 도데의 "별"과 황순원의 "별", 어떤 작품이 더 좋은 작품인지 한 번 대결시켜 보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황순원의 "별"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었죠.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별"은 엄마를 잃고 의붓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한 아이와 그의 누이의 이야기입니다. 그 아이와 누이의 어머니는 같았는데 한 노파가 그 아이에게 누이가 어머니를 꼭 닮았다는 말을 해 줍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아이는 누이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자신의 상상 속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어머니와 누이가 닮았다는 말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던 것이죠. 누이는 아이에게 한결같이 사랑으로 대하지만 아이는 누이를 미워합니다. 누이가 다른 사람과 다툼이 생겼을 때도 모른 척하고 누이가 아버지에게 혼날 때도 오히려 아버지 편에 서서 누이에 대한 증오감을 드러냅니다. 그러다가 누이가 어느 날 시집을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이의 부고 소식을 듣습니다. 아이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대신 골목에 매어 있는 당나귀 등에 올라타고 우리 누이를 왜 죽였냐고 소리를 지릅니다. 당나귀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고입니다.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이라 아이의 눈에 별이 들어옵니다. 오른쪽 눈에 들어온 별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느끼고 왼쪽 눈에 들어온 별이 자신의 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누이가 어머니와 같은 별이 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어 버립니다. 

 

Image by Pexels from Pixabay

 

짧은 소설인데도 줄거리를 길게 쓴 이유는 장면 장면이 모두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40년대 작품이고 익숙하지 않은 평안도 사투리가 섞여 있는데도 소설의 모든 장면이 눈에 선명하게 그려지고 생동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작가의 별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느껴지고 감탄이 나오는 문장도 있었습니다. 역시 황순원 작가의 글은 다르구나, 라고 생각하며 글을 읽었습니다. 

 

서정적이고 독특한 글귀나 문장이 작품을 더 돋보이게 하는데요. 예를 들어 "어둑어둑한 속에서 아이가 하늘의 별을 세며 별은 흡사 땅 위의 이슬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라는 구절이 있는데요. 하늘의 별과 땅 위의 이슬과 같다는 표현이 적절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과는 다른 느낌이죠. 순수하고 밝고 영롱하게 빛나는 별이 아니라, 황순원의 별은 아름답지만 가질 수 없는 별, 아침에 되면 사라지는 별, 너무 멀리 있는 별의 느낌을 전달해 줍니다. 이슬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이죠. 별과 이슬을 붙여 놓으니까, 둘이 떼어 놓고 보면 별로 슬픈 느낌이 없는데 붙여 놓으니까 묘하게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Image by InspiredImages from Pixabay

잠깐 아름다운 문장을 보죠.

 

아이가 구름에 주었던 눈을 소녀에게로 돌렸다. 그리고는 소녀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소녀의 맑은 눈에도 연보랏빛 하늘이 가득 차 있었다. 이제 구름도 피어나리라.

 

 

하늘에 별이 별나게 많은 첫가을 밤이었다. 아이는 전에 땅 위의 이슬 같이만 느껴지던 별이 오늘밤엔 그 어느 하나가 꼭 어머니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수많은 별을 뒤지고 있었다.

 

참 좋은 문장들입니다. 황순원 작가의 이력을 다시 살펴보니 그는 원래 시인이었다고 하네요. 어쩐지...

 

일제강점기에 나온 소설들을 보면 사람의 아픔이 존중받지 못하고, 또 아파할 여유가 없는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픈 일이 너무 많으니까 하나하나 아파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픔도 종종 일어나야지 각각의 사건에 대해서 충분히 애도할 시간이 생길 수 있는 것인데 너무 자주 일어나거나 혹은 그냥 아픔이 배경음악과 같이 삶의 밑바탕에 늘 흐르고 있는 것일 때는 제대로 그것을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누이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당나귀를 타고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은 비정상적인 애도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겠죠.

 

그니까, 사실 너무 슬퍼요. 아이가 엄마를 어떻게 잃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고 상황이었을 것이고요. 누군가에게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표현해야 했는데 그게 애꿎은 누이에게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누이를 정말 싫어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자신의 아픔을 받아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가장 만만했던 사람이 자신의 누이였던 것이겠죠. 

 

Image by Gino Crescoli from Pixabay

 

사람이 참 복잡한 존재입니다. 감정이라는 것도 그렇고요. 그게 뭐라고 제대로 표출이 안 되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걸까요? 아이가 누이가 자신의 어머니와 닮았다고 계속 미워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나 당나귀를 타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나 모두 다 이상 행동입니다. 사람이 대단히 고장이 난 것이죠. 저는 아이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가 그랬던 것이죠. 그 시대가 대단히 고장나고 잘못된 시대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정상적인 행동을 할 수 없는 비정상 사회였던 것이죠. 

 

당나귀 등에 올라타 "우리 뉠 왜 죽엔! 왜 죽엔!"이라고 외치는 아이의 모습과 소리가 너무나도 슬프게 느껴지는 소설이었습니다. 근데 와중에 또 아이의 눈에는 별이 내리고요.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황순원의 "별"은 오래도록 기억이 날 것 같습니다.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