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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알림] 과학은 신학의 친구_존 폴킹혼 "과학으로 신학하기"

설왕은 2021. 3. 8. 23:09

폴킹혼은 물리학자이면서 신학자입니다. 신학을 하다가 물리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물리학을 하다가 신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흔하지 않은 이력입니다. 종교와 과학 사이의 학제 간 연구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중에서 물리를 전공했던 이력을 가진 사람은 더 희박하죠. 그런 면에서 저는 폴킹혼에게 관심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물리에 워낙 관심이 많았고 현대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서 물리학의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폴킹혼의 책은 큰 감명을 주거나 또는 특별하게 재밌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좀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아닙니다. 폴킹혼이 쓴 책 중에 가장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과학으로 신학하기"라는 제목을 봤을 때 처음 딱 드는 생각은 '과학으로 신학하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데'였습니다. 과학과 신학은 다른 분야거든요. 체육으로 음악 하기, 수학으로 영어 하기처럼 들렸습니다. 하려고 하면 못할 것은 아닌데 뭔가 좀 적절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오해가 좀 풀렸습니다. 과학을 이용해서 신학을 한다는 의미가 아닌 과학이라는 맥락(context)에서 신학을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고 필수적인 작업이기도 하죠. 

 

이 책을 통해서 저 스스로에 좀 더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을 하는 방법이 바로 폴킹혼이 제시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과학이라는 맥락으로부터 신학하는 방법을 폴킹혼은 아래로부터 신학하기와 비슷한 뜻으로 사용합니다. 신학뿐만이 아니라 일반 과학도 이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죠. 

 

"더 겸손하게 접근해 가는 아래로부터의 논증은 진전을 이루기에 더 좋은 방법이다. 위로부터의 논증을 통해서 양자이론을 발견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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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과학적 사실을 고려해서 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연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취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아래로부터 신학하기가 있다면 위로부터 신학하기도 있겠죠. 계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칼 바르트와 같은 학자들이 취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폴킹혼이 아래로부터 신학하기를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이 자연신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을 통해서 신을 증명하거나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신학은 자연과 신 사이의 연결 고리가 단단하고 강해서 자연을 잘 들여다보면 신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하는 경향을 띠고 있지만 폴킹혼의 주장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정말 과학의 맥락을 잘 고려해서 신학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보통 과학과 신학을 다룰 때 진화론에 대한 내용이 많은데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이 책의 장점입니다. 진화론이 아니라 20세기에 이루어낸 물리학의 업적을 많이 거론합니다. 양자물리학과 혼돈물리학과 같은 것이죠. 폴킹혼의 신학적 주장은 모두 20세기 물리학이라는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글의 차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론

1장/맥락신학

2장/담론

3장/시간과 공간

4장/인격과 가치

5장/공명: 창조, 섭리, 그리고 관계성

6장/이유 있는 믿음

7장/종말론

후기

 

서론과 1장은 들어가는 글에 해당합니다. 폴킹혼의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2장 담론에서는 20세기 물리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과학의 담론 성격이 바뀌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고요. 3장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다루고 있습니다. 4장은 의식과 이원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5장은 다시 한번 양자물리학을 다루고 있고요. 6장은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해서 과학자-신학자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7장은 과학을 고려한 종말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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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독특한 장은 6장입니다. 신학자라면 부활 사건을 정말 신학적으로 다루는 게 보통이고 과학자라면 부활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찾으려는 게 일반적인 관점이죠. 그런데 폴킹혼은 신학자로서 부활을 믿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대해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과학적 근거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혹은 부활을 과학으로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이 말은 실험으로 반복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누군가 죽었을 때 과학적인 방법으로 그 사람을 부활시키는 실험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육체가 완전히 소멸했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다시 부활할 수 있을지 그 방법에 대해서 제안하고 있습니다. 21세기 과학자라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메타담화 metanarrative, 즉 신학의 의미를 드러내는 신화도 있어야 하겠지만, 상징적 이야기의 힘과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의 힘이 성육신의 교리 속에 모두 녹아들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두 차원의 의미를 진실과 존경으로써 대해야 한다. 기독교의 신화는 실재 사건을 재현한 신화라는 주장이 있다." (p.217-218)
"하지만 우리가 서로 만날 때 하느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가 유일하게 구원의 의의를 갖는다는 나의 이유 있는 믿음을 감추려고 한다면 이것만큼 부정직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p.226)

예수의 부활과 종말론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학이 말하는 인류의 미래는 밝지 않습니다. 우주의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우주의 끝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끝이라고 말하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태양의 종말이라고 하면 그 의미가 확 다가올 것입니다. 태양은 영원히 빛날 수 없습니다. 태양은 언젠가 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태양이 꺼지고 지구가 완전히 사라지더라도, 더 확장해서 우주의 종말이 이르더라도 예수의 부활처럼 인간도 부활할 수 있다면 인간이 존속할 수 있는 방법이 열릴 수 있습니다. 과학자로서 폴킹혼이 제시하는 한 가지 방안은 정보 담지 패턴을 통한 인간의 부활입니다. 누군가 기억하고만 있다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폴킹혼은 신학적 혹은 신앙적 주장이 현실화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특징입니다. 


 

사실 우리는 19세기 과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9세기 과학적 세계관에 의해서 신학도 그런 경향을 띠게 되었습니다. 신도 하나의 거대한 기계나 위대한 원리 정도로 생각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에게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죠. 신의 인격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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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생각해 봤듯이 신의 행위는 중력의 법칙과 같은 비인격적이고 변하지 않는 과정을 따르지 않는다. 인격적인 언어가 신에게 사용될 때 무언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유례없는 환경에선 유례없는 행동을 할 합리적 가능성까지도 포함하는 특별하고 유별난 상황에서는 이에 맞게 특별하고 유별난 응답을 할 자유가 신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p.211)

저도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는데 폴킹혼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이미 글로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놓아서 반가웠습니다. 사람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신의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데, 인간이 신을 자기 뜻대로 움직인다거나 혹은 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완전한 예측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신에 대한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완전히 인간과 같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고 그 이상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인격을 가진 존재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고 해도 그 행동이 똑같을 수 없습니다. 사물을 가지고 실험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다른 형태의 인간 경험에서는 대부분 인격적 요소가 제한 없는 반복 가능성을 제거해 버린다. 모차르트의 사중주곡을 두 번 듣는 일이 동일한 경험일 수는 없다. 심지어 MP3로 반복해서 듣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p.76)

비판적 실재론에 대한 폴킹혼의 설명도 기억할 만한 내용이라서 옮겨 놓습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과학자들이 취하는 인식론적 입장은 '비판적 실재론'이다. '실재론'이 인간의 사회구조와 무관하게 '바깥 저기에' 참으로 있는 본성을 가진 물리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는 확신을 표현한다면(대다수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비판적'은 물리적 실재가 부분적으로 베일에 가려 있고 간접적으로 조우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을 표현한다.(계몽사상가들이 환영해 마지않았던 완전한 객관성의 기대에 반대하여). (p.66-67)

폴킹혼은 과학과 신학이 "지적 사촌 관계"(p.85)라고 말하는데, 이는 실재에 대한 개방성이라는 성격이 매우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사실 과학과 신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은 실재에 대한 개방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유독 과학과 신학이 닮아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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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폴킹혼의 주장에 근본적으로 동의합니다. 과학의 맥락에서 신학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에 입각하여 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새로 밝혀낸 사실들이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신에 대한 이론과 서로 충돌할 수도 있지만 이런 충돌은 서로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학자들의 이해가 틀렸을 수도 있고 과학자들의 발견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과학과 신학의 만남은 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신이 없음을 의미하거나 혹은 신이 세상에 관심도 없고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않는 듯한 암시를 강하게 풍겼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과학이 발견한 것은 19세기까지 과학이 발견한 것과는 다른 양상을 띠었습니다. 19세기까지 과학자들이 발견한 세상은 기계처럼 돌아가는 합리적인 세상이었다면 20세기에 과학자들이 발견한 세상은 합리성을 말할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이전의 이해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해의 문들이 마구 열려서 과학의 영역이 확장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세기까지 과학은 신학과 친구가 되기 어려웠지만 지금 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도 과학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의 발전은 인류 문명의 발전 속도를 가속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지나친 번영을 이루었는지 이제는 파멸을 걱정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태로 인류가 얼마나 더 지구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과학이나 신학이 단독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신학의 협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폴킹혼의 "과학으로 신학하기"는 과학과 신학의 협력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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