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리고시

[시] 존 던 "그림자에 대한 강의"_열두 시에 멈춰라

설왕은 2023. 2. 16. 20:57

그림자에 대한 강의

 

가만히 서 있어요, 사랑하는 이여,
당신에게 사랑의 철학에 대해 강의를 하겠소.
이곳을 거닐며 우리가 보낸
세 시간 동안 우리 스스로가 만든
두 개의 그림자가 우리를 따라다녔지요.
하지만 해가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는 지금
우리는 그 그림자들을 밟고 있고,
그래서 모든 사물들이 아주 또렷해졌지요.
그처럼 우리의 어린 사랑이 커 가는 동안
우리에게서 가식과 그늘이, 그리고
조심성이 생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지요.

남들이 볼까 언제나 노심초사하는 사랑은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랍니다.

우리의 사랑이 정오인 지금 멈추지 않으면
우리는 반대편에 새 그림자를 만들게 될 겁니다. 
남들이 못 보게 하려고 첫 그림자들이
만들어졌으니, 이후에 생기는 이 그림자들은
우리에게 작용해, 우리의 눈을 멀게 할 겁니다.
만일 우리의 사랑이 약해져서 서쪽으로 기울면
당신은 나에게 거짓으로 행동하고,
나는 당신에게 나의 행동을 위장하겠지요.
오전의 그림자들은 차츰 짧아지지만,
이 그림자들은 하루 종일 점점 더 길어집니다.
그러나 아, 사랑이 시들면 사랑의 하루는 짧답니다.

사랑은 자라는, 아니 꾸준히 지속되는 빛이요.
정오가 지난 첫 순간부터 사랑은 밤이랍니다. 

 

 

"어린 사랑"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사랑을 키워나가는 두 사람 그리고 처음 태어나서 자라나는 사랑은 어린 사랑이라고 부르는 게 적당한 것 같다. 그렇지. 사랑을 키워나갈 때는 가식과 그늘이 있게 마련이다.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 줄 수도 없고 숨기고 싶은 것도 있다. 그림자가 있다. 그러나 어린 사랑의 그림자는 길게 시작했다가 점점 더 짧아진다. 그래서 정오가 되면 그림자가 거의 사라지고 그림자를 밟고 다닐 수 있다. 존 던은 사랑이 정오에 이르면 멈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반대편에 그림자를 만들게 될 것인데 사랑이 처음 태어날 때 생긴 그림자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것이지만 정오가 지난 후에 생긴 그림자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눈을 멀게 할 것이라고. 당신은 나에게 거짓으로 행동하고 나는 당신에게 나의 위장된 행동을 보여 주고. 이건 사랑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하면 그 그림자는 점점 더 길어진다. 그러나 지루해질까 봐 겁낼 것 없다. 사랑이 시들면 하루는 금세 가버리니까. 

 

어린 사랑이 자라서 정오가 되면 거기서 멈추기를... 그렇지 않으면 바로 밤이 된다. 

 

사랑하는 모든 연인이 정오의 태양 아래 머물기를... 존 던은 바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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