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너 어떻게 살래/이어령_랑으로 살아라

설왕은 2024. 1. 11. 10:00

* 책을 소개합니다. 이어령 "너 어떻게 살래"

 

 

이 책은 독특하다. 인공지능에 관련된 책인데 인공지능에만 집중하고 있는 책이 아니다. 제목부터 그렇지 않은가? 제목이 "너 어떻게 살래"이고 부제가 "인공지능에 그리는 인간의 무늬"다. 두루뭉술하게 말하면 인공지능과 관련한 인문학 이야기다. 아는 것 많은 할아버지가 아이에게 설명해 주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한참을 설명하기도 하고, 인공지능과 대한민국의 관계에 대해서 뜻밖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공지능을 설명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있는 책이다. 너 어떻게 살래라고 묻고 있지만 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거기에 따를지 말지는 독자의 선택이다. 
 
책이 두꺼워서 기술적인 내용도 꽤 많이 담고 있지만 그보다는 기술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일단 이 책은 재밌다. 이 책의 저자인 이어령 씨는 인공지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네오포비아, 즉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인공지능은 무서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것도 아니다. 인공지능이 그저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저자의 주장은, 우리가 기계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미래이고,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미래가 더 밝아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는 책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편적인 관점으로 글을 쓸 수도 있는데 이어령은 한국인에게 집중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람은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을까? 그와 같은 소양은 자신이 스스로 갖추어야 하는 것도 있지만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철학이 인공지능 시대에 발맞추어 살아갈 힘을 내재하고 있느냐도 중요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한국인이 이렇게 우수한 민족이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에 대한 저자의 접근 방식은 독특하다. 서문의 제목부터가 희한하다. 서문의 제목은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는 이야기"다. 아니 왜 인공지능에 관련된 책의 서문이 이런 제목을 가지고 있을까?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책을 마지막까지 읽으면 이해가 된다. 이어령 교수님은 다 계획이 있었다. 각각의 장들도 꼬부랑 고갯길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1장, 2장, 3장으로 가지 않고 안드로이드 고개, 미래의 동화 고개, 바둑 고개 이런 식이고 고개 안에 소챕터도 첫째 꼬부랑길, 둘째 꼬부랑길, 셋째 꼬부랑길로 구분되어 있다. 각 장의 제목은 훑어볼 필요가 있다. 
 
1. 안드로이드 고개
2. 미래의 동화 고개
3. 아버지 찾기 고개
4. 이세돌 고개
5. 바둑 고개
6. 태극 고개
7. AI의 마을로 가는 고개
8. 딥러닝 고개
9. 구글 고개
10. 생명 고개
11. 인터페이스 고개
12. 디지로그 고개
 
이 책은 인공지능에 대한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알파고와 바둑이다. 알파고 관련 정보는 많이 들어본 적이 있지만 바둑에 대해서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어본 게 처음이다. 바둑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바둑에 대한 책을 읽지 않을 테니 자세한 설명을 들어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 덕분에 알파고 시대에 오히려 바둑에 대해서 알게 될 기회가 생겼다. 바둑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알고 나니 왜 2016년에 있었던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대단한 것이었는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이전까지는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긴 것이 더 계산을 빨리 하는 컴퓨터가 나왔구나 또는 수십 개의 CPU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분산 시스템이 발전했구나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일이었다는 사실. 
 
이 책은 수준 높은 인문학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도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는 쉽고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공지능을 제대로 이해하는 인문학자도 많지 않은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까지 다룬 사람은 아주 드물다. 인공지능에 대한 인문학자의 독특한 접근을 처음 느꼈던 것은 두 번째 고개의 첫 번째 꼬부랑길에서였다. 제목이 "알파고는 코끼리처럼 왔다"이다. 이 책은 조선 시대에 들어왔던 코끼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지금 시대 알파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알파고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태도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지만 코끼리를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은 처음 들어본 것이었다. 그 이야기가 자체가 참 신기했다. 아마 500년 후쯤에 사는 사람들은 알파고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신기하게 생각할래나?
 

조선 태종 12년, 코끼리가 정말로 조선에 들어왔다. 코끼리는 오자마자 공조전서 이우를 밟아 죽인다. 이우가 그 꼴이 추함을 비웃고 침을 뱉자 코끼리가 노한 게다. 참 이해가 안 간다. 알파고 때나 똑같다. 처음 보는 그 코끼리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관찰을 하거나, 하다못해 모여들어 구경이라도 하지 않고, 왜 알지도 못하는 코끼리에 침을 뱉고 비웃다 밟혀 죽나. 가만두면 코끼리가 화를 내고 사람을 죽였겠나. 태종 12년 12월 10일에 실제 일어난, 어이없는 사건이다. 실록에도 적혀 있다. (37)

 

 

 

알파고와 코끼리의 등장을 비교한 것 자체가 아주 흥미로운 시도였다.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 코끼리를 처음 봤는지도 알게 되었고 알파고에 대한 반응도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서는 코끼리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세 번째 고개는 ‘아버지 찾기 고개’이다. 왜 알파고의 아버지는 있는데 어머니는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이런 시답지 않은 질문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대충 넘어가는 것이 보통인데 저자는 진지하게 그 대답을 찾아나간다. 나는 그 진지함에 설득당했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지 못하는 남자들의 열등감이라고 이해를 할 수도 있고 여자들이 생산해 내는 생명보다도 더 뛰어난 존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여하튼 이 ‘아버지 찾기 고개’를 읽고 있으면 남자들에 의한 인공지능 개발이 매우 위험하게 느껴진다. 인공지능 개발이 생명에 대한 도전이고 남성 위주의 세상을 굳건히 지키고자 하는 무모한 열정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이런 바보 같은 질문에 이렇게 진지한 답변을 하는데, 그게 또 말이 된다. 이런 점이 이 책의 탁월한 지점이다.

네 번째 고개부터 본격적인 알파고와 바둑 그리고 이세돌과 한국에 대한 탐험이 시작된다. 이 부분을 읽으면 왜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것이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알파고가 대단한 것뿐만 아니라 바둑이라는 놀이를 하는 사람도 대단하고 그중에서도 바둑 대회에서 줄기차게 1등을 하는 한국 사람이 참 위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냥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신선놀음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바둑이 대단한 것은 경우의 수가 거의 무한에 가깝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는 놀이 중 이보다 더 큰 경우의 수를 가지는 놀이가 있을까? 내가 알기로는 없다. 굳이 만들려면 만들 수 있겠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즐기는 바둑과 같은 놀이는 없다.

구글은 구골(googol)이라는 수학용어에서 왔다. 10의 100승이다. 체스는 경우의 수가 10의 120승으로 비슷하다. 그런데 바둑은 그 경우의 수가 체스는 물론, 구글이 상상한 숫자보다 훨씬 큰, 10의 360승이다. 이것은 사실상 무한에 가깝다. (105)

 

107쪽에 나온 체스와 바둑의 다음 수 비교

 

위의 그림을 보라. 위쪽에 있는 것이 체스의 다음 수 계산이고 아래쪽이 바둑의 다음 수 계산이다. 바둑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컴퓨터가 이런 계산을 한다는 사실보다 사람이 이런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하지 않을 텐데 이런 계산을 하는 컴퓨터를 이길 수 있는 것인지 그게 더 신기하다.

기술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어떤 기술이 개발된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 기술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리 어떤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 역량은 한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태어난 환경과 그의 부모와 조상을 비롯한 수많은 요소가 결합되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 책이 짚어주는 것이 바로 그런 점이다. 그래서 갑자기 실리콘밸리 구글의 마운틴뷰와 서울 광화문을 엮어서 설명하기도 한다. 뜬금없는 요소 같기도 하지만 갑자기 튀어나오는 등장인물이 반갑기도 하다. 인공지능에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이 등장하니 말이다.

헐려도 다시 서고 옮겨도 제자리를 찾는 불멸의 문이 있다. 그것은 광화문 - "빛이 사방을 덮고 가르침이 만방에 미친다"는 세종대왕께서 붙이신 이름 그대로의 문이다. 어떤 어둠도 빛을 삼킬 수는 없다. 그래서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어도, 재건된 그 문이 일제의 폭정으로 다시 헐려 옮겨졌어도, 그리고 그것마저 6.25의 전화로 소실되었어도 보아라. 밤이 지새면 영락없이 다시 솟는 아침해처럼 지금 떠오르는 광화문의 빛. (141)

 

 

 

고전물리학을 연구했던 뉴턴도 철학을 다루면서 신에 대한 사고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이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신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고전물리학은 사람의 머리로 대충 따라갈 수 있다. 거시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의 경험에 따른 직관이 대충은 다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양자 세계와 같은 미시 세계로 가거나 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경우에는 인간이 상상하지 못하는 전혀 다른 세상이 나타난다. 그 세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현대 물리학자들, 특별히 양자물리학의 개척자들은 어떻게 이런 사고를 발전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연구 성과를 어떤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까? 이 책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양자물리학의 아버지(이어령은 아버지라는 표현을 일부러 피한 것 같다)인 닐스 보어가 태극 문양을 보고 양자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기 때부터 본 태극기의 태극 문양이 양자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니. 맙소사였다. 

 

양자물리학의 개시자인 그는 양자론의 해석을 거의 완성하고도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1937년에 방문한 중국에서 태극을 보고 "바로 저거다!" 한 거다. 종래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입자이며 동시에 파장인 세계, 양자의 그 미스터리한 세계를 태극무늬에서 확인한다. 과학 분야의 공적이 인정되어 덴마크 귀족원에 입회하게 된 그에게 문제가 생긴다. 예복에 문장을 달아야 하는데 평민이었던 그에게 가문의 문장이 있겠나. 궁리 끝에 바로 우리 태극 전사들이 국제 경기 나갈 때 달고 다니는 바로 그런 마크를 만들어 붙인다. 그리고 근엄하게 라틴어로 'Contraria Sunt Complementa', 즉 '대립은 상보다'라는 문장을 삽입했다. 그가 중국에 머물러 있을 때, 아인슈타인도 미처 몰랐던 양자의 새로운 이론을 바로 그 태극 문양을 보고 완성했다 했으니 당연한 일인 거다. (154)

 

 


 

양자 세계는 인간의 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이세돌을 이긴 인공지능인 알파고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서 어떤 원리로 인간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단지 승리라는 결과만이 거의 확실할 뿐이다. 그러니 그 방법을 알아내는 것에는 상상력이 필요했다. 이 책은 막간을 이용해 상상력이라는 중요한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주기도 한다. 

 

한비자는 "중국 사람들은 살아 있는 코끼리를 본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죽은 코끼리의 뼈를 살핀 다음에야 살아 있는 코끼리의 모습을 상상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력이라고 할 때 코끼리 상자가 들어가는 게다. 이 추상의 언어들로 인간은 남들이 겪어온 일들을 자신의 체험으로 삼을 수 있다. (174)

 
 
열 번째 장에서 이어령은 인공지능이 진짜 사람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할 고개를 소개한다. 그것은 바로 '생명 고개'. 로봇은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버린다. 뭐, 어차피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인간도 잘 모르는 것인데 타인과 감정의 교류를 하는 것이란 타인의 표정이나 말 그리고 행동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로봇도 그것을 할 수 있다. 인간의 말과 행동을 분석하고 그에 따른 반응을 보여 줄 수 있다. 로봇이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그와 같이 반응하는 로봇을 보면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오랫동안 발전되어 온 인간의 사고와 행동 패턴이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로봇도 그냥 감정이 있다고 인정해 버리자.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인간이 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18세기 프랑스의 자크 드 보캉송이  생명을 흉내 내서 만들어 낸 똥 싸는 오리를 설명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이 되려면 먹고 싸야 한다. 바로 생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먹는 척, 싸는 척이 아니라 진짜 먹고 싸는 생리 작용을 보여 줄 수 있어야 그 인공지능을 진짜 인간이 되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생명 고개를 넘어가면서 갑자기 똥 얘기를 한다. 우리나라에는 똥에 대한 긍정적 이야기가 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꼬부랑 할머니의 똥 누는 이야기, 이것을 노래한 시인이 동서고금 어디에 있으랴. 생명을 노래한 서양의 보들레르, 말라르메, 에드거 앨런 포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똥오줌 먹고 자라난 새벽의 푸성귀 같은 생명의 소리, 그 싱싱한 메타포를 노래한 시인은 지구상에 딱 한 명 있을 거다. 그게 '질마재 신화'의 서정주다. (267)

 
 

인공지능을 연구하면서 학자들 그리고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똑똑할 수 있다는 사실. 인간은 피조물 중에서 인간이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해 왔다. 정말 오랫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주장은 꽤나 그럴듯한 인간에 대한 단순 명료한 정의였다. 그러나 인간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이성, 다른 말로 하면 똑똑함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다른 피조물인 인공지능이 훨씬 더 뛰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질문을 해야 한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이성이라는 단어가 인간을 설명하는 핵심어가 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인공지능 연구는 인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러나 인공지능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는 분명히 그리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인공지능이 오히려 인간과 인간의 지능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게 한 거다. 그래, 한마디로 그 차이를 말해보겠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모든 것들에는 생명이 있다고 생각했고 현대인들은 거꾸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물질로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더 짧은 말로 말하자면 "옛사람들은 비 생명도 생명으로 현대인은 생명도 비 생명으로 본다." 모든 차이가 여기에서 온다. (280)

 

 

이 책에서 로봇의 어원도 처음 알게 되었다. 로봇이라고 하면 일단 신기하게 생각하고 로봇 자체에 관심을 두어서 그런지 로봇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 책은 친절하게 로봇의 어원을 알려 준다. 그런데 왜 알려 주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어원으로 볼 때 로봇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로봇’이라는 말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소설가 차페크의 희곡 ‘로숨의 인조인간’에서 처음 사용됐다. 강제노동을 뜻하는 체코어 ‘로보타’에서 온 말이다. 쉽게 말해 노예다. 그는 명령한 대로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전설 속 진흙 인형 골렘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썼다. (골렘: 히브리어 겔렘-물건의 재료-, 혹은 갈미-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의 상태-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289

 

 

 

로봇의 어원이 노예였다니. 전설 속 진흙 인형 골렘에서 나온 말이라는 놀랍다. 인공지능을 열심히 개발하고 있는 것은 동양이 아니라 서양 세계이다. 그런데 인간과 유사한 인공지능이 나타나는 미래를 그린 영화, 소설, 드라마에서는 왜 그렇게 로봇이 인간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그 이유가 로봇이라는 단어 자체에 들어 있는 것 같아서 끔찍하다. 인간들이 마구 부려먹던 노예가 결국은 반란을 일으켜 노예들의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어두운 예상. 만약에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자들이 이와 같은 복선을 느끼고 있다면 이것은 아마도 그들이 무엇인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어두운 무의식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로봇의 어원에서부터 서양은 이미 인공지능의 반란을 예상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조물주와 피조물의 대립이 서양문명의 내력이라고 밝힌다. 이 부분도 물론 일리가 있다. 

 

인공지능의 반란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서양의 콤플렉스다. 나는 이것을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 밈’이라고 명명한다. 조물주와 피조물의 대립이 서양문명의 내력이다. 이 상극의 드라마는 신화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굵은 계보를 이룬다… 이 골렘 전설부터 프랑켄슈타인 이야기까지, 모든 서양의 신화와 소설이 다 피조물이 조물주를 들이박는 이야기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이 서구 문명의 특성이다. 애초에 공존할 생각이 없는 게다. 여기서 인공지능 위협설이 나오는 게다. (292-293)

 

 

하지만 나는 이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서양의 오랜 역사는 조물주의 뜻에 굴복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했다. 근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그와 같은 경향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니체에 이르러서 첫 열매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공존할 생각이 있었는데 잘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는 게 옳지 않을까? 그런데 인간이 결국 조물주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킨 죄책감 때문일까? 인간도 자신이 창조한 인간 같은 인공지능에 대해서 비슷한 결과를 예상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결국 인공지능도 자신의 창조자를 배반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과 같은 존재라면 말이다. 인간이 그러했듯이.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이니까. 인간의 본능을 부여받은 인공지능이라면 그리고 인간보다 더 똑똑한 인공지능이라면 인간이 몇천 년 이상 걸려서 이룩한 반란을 단기간에 해내지 않을까? 이런 식의 해석이 더 맞지 않을까? 

 

요즘 어떤 나라의 특수부대원들은 작전 중에 잠을 잘 때 로봇을 끌어안고 잔단다. 지뢰 탐색 중에 로봇이 파괴되면 울면서 무덤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사랑했던 ‘피그말리온’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 거다. 영화 ‘A.I’에서는 로봇이 알아서 인간이 됐지만, 지금은 인간이 로봇을 인간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영국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여성 로봇과 살겠다는 남성들이 나타났다. 이에 대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생각’이라며 반대하는 운동이 뒤를 이었다. (299) 

 

 

이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로봇은 실제로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은 로봇을 인간처럼 대우하기 쉽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럴 것 같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로봇은 움직인다. 움직이는 데다가 인간을 도와주기까지 한다. 살아서 움직이든 그냥 움직이든 인간은 움직이는 것을 살아 있다고 느끼기 쉽다. 저자는 인간이 로봇을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하는데 그런 현상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더 많이 일어날 것 같다. 인간처럼 말하는 능력을 갖추기 시작했으니 인간은 로봇을 인간으로 착각하기 쉬울 것 같다. 억지로 억지로 노력해서 로봇은 로봇일 뿐이야라고 되뇌어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며 살아갈 것 같다. 결혼하지 않고 여성 로봇과 살겠다는 남성들이 있다니 그것은 놀랍다. 진심일까? 모쏠의 자기변명 같은데.

 

열한 번째 고개는 인터페이스 고개다. 아마도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할 것 같다. 그다음 고개도 있기는 한데, 디지로그 고개라고. 그런데 내 생각에는 열한 번째 고개로 끝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마지막 고개는 첨언으로 보이고 오히려 이 책에서 내세우는 주장의 명료함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디지로그는 다른 책에서 더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인터체인지의 의미는 영어와 한국말이 전연 다르다. 인터체인지의 한쪽은 입구이고 한쪽은 출구이다. 영어에서는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대립개념으로 나뉘어 있다. 이 분리는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절대로 합쳐질 수 없다. 그런데 한국말에는 나가고 들어오는 정반대 말이 한마디 말로 합쳐져 '나들목'이라고 되어 있다. 아하! 나들목, 나가고 들어오는 길목을 줄여서 그렇게 부른다. 고속도로가 생긴 뒤 만들어진 말이다. (329)

 

 

인터페이스 고개는 우리말로 하면 목 고개 정도 될 것 같다. '목'이라는 단어에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니 새삼 놀랐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입구와 출구가 항상 나누어져 있는 서양인들의 의식과 입구와 출구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 한국인의 의식이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재밌었다.  

 

서양은 '이 목'을 모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몰라도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고 쓰는지 궁금하다. 이게 목과 몸통을 작두로 잘라버린다는 말이다. 뇌가 있으니 존재하지 팔다리는 아무 소용없다. 서양의 '인간기계론'이 여기서 대두된다. "나는 뇌가 있다. 고로 존재한다." 모든 인공 뇌, 인공지능이 여기서 생겨난 거다. (334)

 

 

 

목을 언급하면서 이와 같이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저자의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데카르트의 주장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들어봤지만 이 해석이 제일 무시무시하다. 재밌고 기발하기도 했다. 어쩌면 데카르트의 철학이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사람들의 정신 맨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들 그렇게 뇌만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현대 과학 중에서 제일 각광받는 분야가 뇌과학이기도 하다. 뇌과학이라고 하면 첨단이면서 가장 중요한 연구를 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의 뇌만 있으면 그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서양 철학, 데카르트의 철학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장은 목을 자르면 안 된다는 것. 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고개에서 목과 함께 중요하게 나오는 단어가 바로 '사이'이다. 서문에 꼬부랑 할머니와 꼬부랑 고개가 등장한 이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바로 '랑'의 중요성, 사이의 중요성 때문이다. 

 

그 짝을 두고 '기계와 나'  '기계와 사람'처럼 '와'자를 넣으면 기계와 인간과의 관계가 서양처럼 된다. 그런데 '랑'자를 넣으면 한국적으로 '사이'가 된다. 동양식 사이 문화로 바뀌는 게다. '기계랑 나'. '너랑 나랑'이라는 말처럼 '랑'이라는 말은 친화력이 있다. (343)

 
우리가 제일 자주 쓰는 '랑'은 아리랑일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리랑의 의미를 우리는 잘 모른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말인가? 이어령 교수님은 아리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리랑 쓰리랑'에도 우리말 '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나. 아리랑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있다. 밀양 군수의 따님 '아랑'의 이름이 변형된 것이라는 설도 있고, 의미 없는 후렴구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아리랑 뒤에 쓰리랑이 붙어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사실 아리랑 고개는 님이 떠나는 고개니 '아리고 쓰린' 고개가 그 아리랑 고개다. 거기에 '랑'을 붙여보라. 아리고 쓰린 고개가 신도 나는 고개가 된다. 이게 바로 '랑의 효과'다. 
몇 해 전 스페인에서 아리랑이 연주된 일이 있었는데, 40대의 한 스페인 청중은 "신났는데 슬펐다"라는 말을 전했다. 그렇다. 슬픈데 신바람이 나고, 신나는데 슬픈 것, 이것이 바로 아리고 쓰린 것에 '랑'이 붙어 생기는 '랑의 효과'인 게다. (344)

 

 

아주 일리가 있다. 인공지능에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되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한국과 한국인에 관련된 인문학 서적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정보를 인공지능 관련 책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좋았다. 인공지능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책의 대답은 한 글자로 대답하면 '랑'이다. 인공지능이랑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목을 중요하게 여기니까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자주 말하니까 또 우리는 아리랑과 같이 '랑'을 좋아하니까 인공지능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이 책은 과학을 적극 받아들이고 이용하는 책이다. 그래서 거울 뉴런이라고 하는 신경 세포를 끌어들여 우리의 행동을 촉구하기도 한다. 

 

'따로따로 사이좋게 살아라.' 이 모순의 인터페이스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 '거울 뉴런'이다. 원숭이의 뇌 반응을 실험하던 이탈리아 학자(Giacomo Rizzolatti)가 발견했다. 그는 원숭이의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고 우리에 먹을 것을 넣었다. 원숭이가 손으로 물체를 잡는 그때의 뇌 반응을 연구하려 했던 거다. 그런데 실험 도중 서류가 떨어져서 사람이 그걸 집으려는 순간에도 갑자기 '삐삐삑-' 하고 신호가 울리더란다. 
원숭이 뇌 속에 거울과 같은 신경세포가 있다는 걸 이렇게 발견한 거다. 그래서 내가 서류를 집으면 저도 집고, 내가 피를 흘리면 자기도 흘린다. 원숭이 새끼 앞에서 손을 하늘로 뻗치면 원숭이도 똑같이 행동하는 이유가 거울 뉴런에 있었다. (352) 

 

 

 

 

"어떻게 살래?"라는 질문은 참 어려운 질문이다.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똑똑하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인간은 인간이 최고로 똑똑하다는 자부심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 인간의 특징이 무엇인지 다른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이 책은 인공지능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는 책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에게 똑똑함으로 맞설 것인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특성을 더 개발해야 지구에서 인간의 우위를 지키면서 멸망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 책은 우리를 엉뚱한 길로 이끌 수도 있을 것 같다. 꼬부랑 길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니까. 그리고 그 꼬부랑 길은 인류에게 닦친 암울한 미래를 피할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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