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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주제 사라마구_우리 안에 뭔가가 있어요

설왕은 2024. 3. 20. 09:00

 

눈먼 자들의 도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가 쓴 대표적인 장편 소설이다. 나는 어떤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그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는 않는다. 나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의미하는 것은 그 작가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평론가들에게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 소설이 재미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작품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내 기준으로는 별로일 수도 있고 또는 그 작품성이라는 것은 특정 상황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작품성이라는 것이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한다. 작품성을 유지하느라고 재미의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게 된 것은 소재의 독특성 때문이었다. 작가의 특이한 상상력에 끌렸다.

 

사라마구의 소설 장르는 환상적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장르의 소설을 쓰는 사람이 누가 또 있을까? 내가 아는 한 이런 장르의 소설은 별로 없다. 소설이라면 다 지어내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환상과 현실주의가 붙어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판타지 소설이거나 아니면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소설이거나 둘 중에 하나이기가 쉽다. 환상 소설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연거푸 일어나는 소설일 테고, 현실주의 소설이라면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건조하고 치밀한 묘사를 통해서 현실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일 것이다. 그런데 '눈먼 자들의 도시'는 사람들이 갑자기 눈이 멀었다는 환상적 설정을 제외하고는 현실주의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사라마구의 소설은 장르 자체가 독특하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갑자기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된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일을 그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눈이 멀 수 있을까? 물리적으로 다친다면 눈이 멀 수도 있지만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은 감염병으로 인한 것이다. 

 

* 줄거리

노란 불이 들어왔다. 차 두 대가 빨간 불에 걸리지 않으려고 가속으로 내달았다. 횡단보도 신호등의 걸어가는 사람 형상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아스팔트의 검은 표면 위에 칠해진 하얀 줄무늬를 밟으며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7)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게 눈이 먼 사람이 한 사람 발생했고 이 병은 감염 경로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채로 급속도로 퍼졌다. 정부에서는 이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서 눈이 먼 사람들을 모아서 폐쇄된 오래된 정신 병원에 감금했다. 감염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의료서비스는 전혀 제공되지 않았다. 이들은 철저히 격리된 채로 외부로 나올 수 없도록 군인들이 철저히 감시하게 되었다.

 

병원에 감금된 이들은 완전한 무정부 상태 속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 눈이 먼 사람과 안과 의사, 그리고 그의 아내를 비롯한 몇 명은 나름대로 공동체를 형성하여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군인들은 눈이 먼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먹을 것을 제공하기만 했다. 이 병원에는 눈먼 자들만 갇혀 있게 되어 있었지만 안과 의사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을 돌보기 위해 눈이 먼 것처럼 속이고 병원 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의사의 아내는 자신이 볼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는 자신이 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이런저런 요구를 해 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병원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들어오게 되었고 그들 중에는 악당이 있게 마련이다. 악당들은 무리를 지어 병원에 공급되는 식량을 독점하고 다른 이들이 가진 것을 갈취하거나 성폭행을 저지르고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다. 의사의 아내가 포함된 무리는 악당들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했으나 그녀가 가위로 악당의 우두머리를 살해하면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도시의 시민 전체가 감염병으로 인해서 시력을 잃게 되었다. 의사의 아내는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속한 무리를 이끌어 병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의사의 집에 도착하여 그 집을 거점으로 식량을 구해 와서 서로 나누기도 하고 더러워진 옷을 빨고 몸도 씻고 새 옷도 갈아입게 되었다. 도시에는 식량 공급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기 때문에 눈이 먼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계속 헤매고 있었고 굶어 죽는 사람도 생기고 식량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고로 수많이 사람이 동시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생겼다. 이런 광경을 유일하게 눈으로 목도할 수 있는 의사의 아내는 큰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그들 모두 지쳐가고 있는데, 갑자기 처음 눈이 멀었던 사람의 시력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시력을 회복했다. 

 

의사의 아내는 일어나 창으로 갔다. 그녀는 쓰레기로 가득 찬 거리,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며 노래 부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어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내 차례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461)

 

 

* 따옴표는 왜 안 쓰는 걸까?

나는 이런 글은 처음 봤다. 굉장히 읽기가 불편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따옴표가 없다는 것 때문이다.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는 따옴표를 붙여서 구분을 해 주어야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대화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따옴표를 안 쓰니까 구분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집중해서 읽으면 어느 부분이 일반 서술이고 어느 부분이 대화인지 분간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냥 읽고 있으면 헷갈린다. 나는 책 제목이 '눈먼 자들의 도시'이기 때문에 사라마구가 일부러 이렇게 쓴 것이라고 짐작했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간접적인 눈멂의 경험을 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의도적인 장치라고 생각했다. 그래, 소설에는 항상 볼 수 있었던 수많은 따옴표가 없어지니 얼마나 불편한지 너도 경험 좀 해 봐라는 식의 작가의 강압적 친절이라고 넘겨짚었는데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사라마구는 원래 글을 쓸 때 이렇게 쓴다고 한다. 그의 다른 소설도 이런 식으로 쓴다고 하니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특별히 연출된 글의 형식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사라마구한테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왜 이렇게 글을 썼을까?

 

 

* 의사의 아내가 주인공이다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무리의 각 사람은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 의사, 의사의 아내, 자동차 도둑, 검은 색안경을 낀 여자, 검은 안대를 한 노인, 사팔뜨기 소년으로 나온다. 사람들끼리 이름을 물어보지도 않는다. 각 사람의 특징이나 그 사람에게 일어났던 사건, 그 사람의 직업, 외모의 특징에 따라서 적당한 호칭으로 부를 뿐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 무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의사의 아내였고, 아마도 의사의 아내가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왜 의사의 아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왜 의사의 아내는 의사의 아내라고 불렀을까?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만의 특징이나 사건으로 부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들 사이에서 의사의 아내가 가진 특징으로 부른다면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여자' 또는 '안 보이는 척하는 여자'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라마구는 그녀를 '의사의 아내'라고 부른다. 의사의 아내는 눈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함께 폐쇄된 정신 병동으로 같이 들어간다. 자신이 시력을 잃게 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눈이 멀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고 병원으로 들어간다. 그렇다고 의사의 아내가 자신의 남편에 대하여 대단한 애정을 품고 있어서 같이 들어가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의사에게는 도움이 손길이 필요하고 자신이 아내로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같이 들어갔던 것 같다. 아니면 경황이 없어서 다른 판단을 내릴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만이 스스로에 의한 주체적 호칭이 아니라 자신의 남편에서 종속되어 있는 듯한 '의사의 아내'라는 호칭을 얻는다. 그리고 그녀의 무리는 결국 그녀 덕분에 온갖 더럽고 무시무시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의사의 아내가 대단한 영웅은 아니었다. 남편이 정신 병원에 갇히게 되는데 맹숭맹숭하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도 웃겼을 것이다. 그저 아내로서 또는 의사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 무리의 여자들이 깡패들에 의해서 성상납을 요구받았을 때도 의사의 아내도 처음에는 용기를 내서 저항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깡패 두목의 목을 가위로 찔려서 죽이지만 이것 역시 영웅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참다못해 나선 최소한의 정당방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의사의 아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을 수행한다. 다들 눈이 먼 상태에서 그들 모두를 제대로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의사의 아내는 자신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발설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관계 안에서 최소한 책임만을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그들 무리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 제일 궁금했던 것은

이 소설에서 제일 궁금했던 것은 인간에게 본다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것이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시력을 잃은 사람들도 있다. 선천적으로 볼 수 없는 사람도 있고 사고나 질병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의 비율은 매우 낮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볼 수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고 인류의 문명은 시각이라는 감각이 없이는 절대로 현재의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각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감각인데 만약에 인간이 시각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단순히 보이지 않아서 불편한 정도 이상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힘들고, 실험해 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라마구의 상상력의 세계에 발을 들여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눈먼 자들의 도시에 살게 될 인간 사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사라마구의 상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세상은 더러워질 것이 분명하다. 지금처럼 인간이 서로 다닥다닥 모여 사는 도시가 많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모두 시각을 잃는다면 배설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화장실에 가는 것 자체가 힘들 것이고 대소변을 보고 난 이후의 뒤처리도 용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몸을 씻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빨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 역시도 난관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눈먼 자들의 도시'는 구역질 나는 냄새가 가득 찬 도시로 묘사된다. 깨끗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어쩌면 시각 때문이지도 모른다.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354)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눈이 없다면 정말 다양하고 심각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 사라마구의 인간론 또는 존재론

인간이란 무엇일까? 모든 책과 모든 영화와 모든 그림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다.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도 마찬가지다. 사라마구의 존재론 또는 인간론이 그의 글에서 드러난다. 여기서도 주목해야 하는 점은 바로 등장인물들이 이름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쩌면 사람이 이름을 갖게 되는 것도 시각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사람을 처음 만나면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이름을 묻는다. 그래야 그 사람을 분간할 수 있고 부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만약에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다면 이름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목소리로 사람을 분별해 낼 수도 있겠지만 얼굴로 분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시각을 잃는다면 우리는 타인의 이름에 관심을 덜 가질 뿐만 아니라 타인 자체에도 신경을 덜 쓰게 될 것 같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알면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일까? '눈먼 자들의 도시'의 사람들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라마구는 색안경을 썼던 여자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우리 내부에는 이름이 없는 뭔가가 있어요, 그 뭔가가 바로 우리예요. (388)

 

나는 나의 이름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이름 없는 그 무엇, 그것이 바로 나라는 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나의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 될 때 진정한 '나'가 된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의사의 아내는 우연히 만나서 도움을 주고받았던 한 여자가 죽자 그 여자를 묻어주면서 다음과 같이 행동하고 말한다. 

 

의사의 아내는 무덤을 다 팠을 때, 마침내 그들을 보았다. 그녀는 아픈 허리를 펴고,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어 어떤 저항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특별한 생각 없이, 그 눈먼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상의 모든 눈먼 사람들에게, 이 여자는 부활할 거예요, 하고 소리쳤다.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녀가, 이 여자가 다시 살 거예요, 하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라. (425)

 

 

* 삶의 관성을 벗어나게 될지도...

우리는 도대체 우리의 존재 이유를 알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또는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살고 있는 것일까? 알고 있는 척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저 우리의 삶에 익숙해져서 말이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서 정지해 있는 것은 계속 정지해 있으려고 하고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이려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저 그 익숙함에 우리의 몸을 맡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모두가 눈이 멀어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 당연하게 여겼던 삶의 관성에 벗어나서 인간과 존재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릴지도 모른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다 시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시각을 잃었던 시간은 그들의 전체 삶에서 아주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삶은 이전의 삶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도 그럴까? '눈먼 자들의 도시'가 삶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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