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사막의 지혜/로완 윌리엄스_공동체 삶을 위한 고독?

설왕은 2024. 3. 21. 09:00

'사막의 지혜'는 3세기 중반 이집트 사막에서 일어났던 수도원 운동 속에서 활동했던 수도사들이 얻는 삶의 지혜를 나누고 있는 책이다. 나는 그리스도교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선도해 나가고자 하는 의도가 가득한 종교다. 따라서 세상을 등지고 칩거하거나 홀로 떨어져서 도를 닦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반대한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로완 윌리엄스가 썼기 때문이다. 윌리엄스는 누구보다도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학자이다. 그런 그가 사막의 수도사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면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주는 좋은 가르침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막의 수도사들은 철저하게 고독한 삶을 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처음에는 박해를 피해서 사막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고 그러려면 홀로 깊숙한 사막으로 들어가야만 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박해가 멈춘 뒤에도 이어졌다고 한다. 윌리엄스는 사막의 수도사들이 염세적이지도 않았고 세상을 증오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명성을 얻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그들은 더욱더 그 명성을 피해 달아났다고 한다. 

 

외적으로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것은 단순히 고독한 삶을 택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내적으로는 자신의 기도를 점점 더 순수하게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수도사는 고독한 가운데 침묵에 집중하며 점차 말의 침묵으로부터 마음의 침묵까지 나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말로 하는 기도, 이미지, 개념, 외적 의례에서 벗어나 그 자신이 온전히 하나의 기도가 됩니다. (13-14)

 

 

사막 수도사들의 금언은 설교와 같이 긴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간단한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완 윌리엄스는 그리스어로 기록된 두 개의 모음집인 '알파벳 모음집'과 '무명 모음집'을 번역해서 사막 수도사들의 말을 전한다. 

 

책은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생명, 죽음 그리고 이웃

2. 침묵과 꿀 케이크

3. 도피

4. 머무르기

 

사막의 수도사들이 고독을 즐기며 영적인 삶을 추구했다고 하면 그들은 이웃을 도외시하고 홀로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 집중하며 살았을 것 같은데, 오히려 첫 장의 제목이 '생명, 죽음 그리고 이웃'이다. 윌리엄스는 사막의 수도사들이 깨달은 영성이란 "영원한 진리 및 사랑을 감지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며 영원한 진리 및 사람과 보람 있는 관계를 맺는 것"(30)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윌리엄스는 압바 모세의 가르침을 강조한다. 압바 모세는 수도사라면 자기 이웃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이 말은 이웃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판단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신앙의 기초는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이웃을 얻는 것'이다. 사막의 수도사들이 이웃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러한 관용과 용서의 자세는 너무 심하지 않나 생각될 정도이다. 

 

몇몇 원로가 압바 포이맨에게 와서 물었다.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중에 조는 형제를 보면 우리가 그를 흔들어 깨워야 합니까?" 압바 포이멘이 대답했다. "나는 자고 있는 어떤 형제를 보면 그의 머리를 내 무릎 위에 누이고 그를 쉬게 할 것입니다." (46)

 

 

남의 잘못을 절대로 지적하지 말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남의 잘못을 판단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줄이고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살펴보라는 가르침이다. 자신의 잘못을 보고 고치는 것도 바쁜데 언제 남의 잘못을 들여다보고 있냐는 것이 사막 수도사들이 주장하는 바다. 이런 내용을 보고 있자니 사막의 수도사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하고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하나님의 용서는 이미 일어났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사랑과 용서를 어디 가서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색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너무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사막의 수도사들은 이러한 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것은 사람이 평생을 노력해도 이르기 힘든 경지다. 세상에서 겪는 경험과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서로 충돌한다. 그런 과정에서 내적 갈등은 멈추지 않는다. 삶이란 내적 갈등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사막의 수도사는 싸움을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죄의 권세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활동하심으로써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이 활동으로 창조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교회라는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에서는 궁극적으로 서로를 통해서만 살 수 있습니다. 사막 수도사들과 수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부정을 행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62-63)

 

 

어떻게 보면 사막의 수도사들이 추구했던 것은 이상적인 공동체 생활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 생활이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경쟁 상대를 물리치는 것에 마음을 쏟을 때가 많다. 하지만 사막의 수도사들은 어떻게 해야 같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서로를 선대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실천했던 것 같다. 이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웃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막으로 갔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64) 

 

로완 윌리엄스가 사막 수도사들의 입과 삶을 통해 제일 말하고 싶은 것은 이미 1장에서 모두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2장부터는 구체적인 상황들에 대한 묘사를 덧붙이고 있다. 2장의 제목은 '침묵과 꿀 케이크'다. 재밌는 제목인데, 어떤 수도사는 하나님을 위해서 침묵하고 어떤 수도사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웃들과 꿀 케이크를 나눠 먹는다는 상반되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각각의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의 방식과 소명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두 각자의 부르심이 있다는 것이고 누군가의 부르심이 다른 이의 부르심보다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웃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정말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사라져 버린다면 나는 내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에 대해 어떤 실마리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81)

 

 

 

로완 윌리엄스는 그리스도인은 개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95) 인격체로 산다는 것은 이웃과 함께 살아가면서 관계를 형성하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각의 위격이 인격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연결된다. 인격체는 개인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며 교회는 개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인격체들의 공동체다. 인격체는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건강한 교회 안에는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성품을 지닌 이들이 발견되기도 한다고 로완 윌리엄스는 주장한다. 

 

나는 3장 '도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도피라는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피는 나쁜 거니까. 그리고 초반부를 보면 인간 무리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수도사가 추구했던 것 중에 하나라는 말이 나온다. 도피는 자신의 죄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설명도 나오긴 하는데(113) 죄에 대한 책임은 주로 이웃과 관련된 것 아닌가? 사막 수도사들은 말로부터 도피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즉 침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을 피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과 의식 사이의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이란 말을 듣는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침묵은 단순히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에 대해 점검하는 것을 뜻한다.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부터 도피도 필요하다. 그들의 생각이 꼭 올바르고 선한 것은 아닐 테니까 이 말도 일리가 있다. 

 

개인으로서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인격체가 되기 위해, 인격체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체제에 순응하는 데서 벗어나면 그는 이내 사막 수도사들이 마주했던 것과 같은 도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도사들이 그랬듯 침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128)

 

 

마지막 4장의 제목은 '머무르기'다. 말 그대로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다면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이것 역시 3장과 더불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상에 나가지 않고 수도원에 머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삶의 방향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이 장은 수도원 생활을 금방 접지 말고 충분한 가르침과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머무르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쓴 것 같다. 수도원은 할 일이 없고 지루한 곳이었을 것이다. 심심함을 견뎌 보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시련이 닥쳤을 때 그것을 피하지 말고 온전히 당하라는 의미도 전달한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생겼다고 그곳을 떠나는 것, 또는 반대로 문제가 없다면 문제가 없다고 그곳을 떠나는 습관을 탈피해야 한다. 로완 윌리엄스가 인용한 애니 딜라드의 멋진 말을 첨부한다. 

 

멋진 작업장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 때문에 어떤 사람은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방을 원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상상력이 기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162)

 

 

 

지금 당장 대단한 변화를 일구어 낼 것을 기대하지 말고 그저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머무르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싶다. 로완 윌리엄스는 예수의 고난도 언급한다. 예수가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기도 했지만 결국 정말 중요한 순간에 그는 평범한 인간으로 고난을 감당하고 문제를 떠안은 채로 견뎠다. 인간은 몸을 입고 살고 있는 상태에서 제대로 머무를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으로 사는 것에도 머무름의 기술을 발휘해야 한다고 로완 윌리엄스는 말한다. 

 

우리가 우리로서 있는 사막에 하느님의 아들이 걷고 있는 용광로가 있습니다. 관조적인 신실함contempative faithfulness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바로 저 용광로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막에서, 예상치 못하게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예상치 못한 사람을 통해, 예상치 못한 계기로 우리는 엿보게 될 것입니다. 불이 타오르고 있음을, 사막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있음을. (180)

 

 

로완 윌리엄스가 아니었다면 정말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 같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그리스도의 교회가 수도원이 웬 말인가? 하지만 이웃을 소중하게 여기는 로완 윌리엄스가 사막 수도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과연 사막 수도사들의 수련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공동체 속에서 인격체로 살아가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 궁금증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막 수도사들의 도피성 신앙 수련이 좋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물론 그들의 도망감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가능성도 있는 것 같다. 사막엔 길이 없는 것 같은데, 사막에서 길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들은 길을 발견했을까? 그래서 그들은 제대로 돌아왔을까? 여전히 궁금하다. 하지만 로완 윌리엄스 덕분에 사막 수도사들에 대하여 내가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를 꽤 걷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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