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나

[SK] 키에르케고르 "불안과 마녀의 편지"

설왕은 2019. 3. 28. 14:59

 

 

키에르케고르는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신학자입니다. 실존주의를 연구하는 철학자라면 키에르케고르보다는 하이데거를 연구하는 사람이 훨씬 많겠지만, 신학자는 반대입니다. 실존주의를 좋아하는 신학자는 하이데거보다는 키에르케고르죠. 키에르케고르가 하이데거보다 더 매력적인 점은 하이데거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바로 철학과 신학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철학은 '형이상학적인 말놀이'라면 신학은 '실천적인 말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존주의적 관점이 많은 기독교인에게는 거북할 수도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신앙도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니까요. 진리도 상대적입니다. 2+2=4라는 수학적인 진리가 인간 세상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입니다. 진리는 개인적인 진리, 나에게만 진리로 작용할 수 있지, 실존적인 입장에서 객관적 보편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으로 알려진 키에르케고르에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조차도 아주 주관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주관적인 진리는 개인적으로 고백할 수 있지만 타인에게 강요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죠. "나는 우리 집 근처에 있는 희원에서 만든 짜장면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개인적으로 진리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아니라고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이고 그 경험에서 나온 진실된 고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남에게도 같은 것을 먹이고 나와 같은 고백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죠.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죠.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불안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질문에 벌써 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은 좋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하나의 종합(정신에 의한 마음과 육체의 종합)이기 때문에 불안해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 불안이 깊으면 깊을수록 인간은 위대하다." (불안의 개념, 166)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는 신앙을 "무한성을 성취하는 내적 확신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불안의 개념, 168) 뭐랄까요, 불안은 독이 든 성배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의 위험성에 대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불안으로 인해 극단적으로 타락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말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을 가진다면 이 불안을 그냥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우리가 불안으로 인해서 신앙을 갖게 되었으나 신앙 안에서 운명을 발견하고 운명을 신뢰하려고 한다면 불안이 다시 이 운명을 제거해 버린다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운명은 불안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불안은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마녀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불안의 개념, 171)

 

 

마녀의 편지의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느낌은 확 옵니다. 유혹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 유혹에 넘어가면 더 비참한 파국을 맞게 될 것입니다. 불안하다고 신앙을 의지하고 종교에서 말하는 운명을 믿다가는 그 결말이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불안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즐겨야 할 배경음악입니다. 

 

"불안해지는 것을 제대로 배운 자는 유한성의 온갖 불안이 연주를 시작하여 유한성의 제자들이 자신의 정신과 용기를 잃게 할 때에도 춤추듯이 걸어갈 것이다." (불안의 개념, 173)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말도 하는데요.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모든 사소한 일에는 불안을 느끼나, 중대한 일이 생기면 훨씬 편안한 숨을 내쉰다." (불안의 개념, 173)

 

이 말은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우울증에 빠져서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온갖 사소한 일에 대해서 그 일이 진행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조작하기 때문에 그런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여러 가지 가능성이 현실화될 확률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중대한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조작하는데 사소한 일과는 달리 중대한 일은 그 가능성이 실제로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불안으로 인한 조작하는 능력을 사용해 그 현실에 대처하게 되는 것이죠. 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우울증에 빠진 분들은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네요. 

 

그렇다면 우울증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닐까요? 키에르케고르는 우울증 환자는 "불완전한 독학자"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독학자는 이런 태도를 신에게 배운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우울증에 걸리신 분들, 혹은 불안에 떨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키에르케고르의 메시지는 다소 희망적입니다.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랍니다. 불안이 깊을수록 인간은 위대하다니까요. 불안하다고 어디가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죠. 지극히 정상이고 오히려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불안 때문에 불안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안은 양날의 검입니다. 매우 다루기 힘든 리듬과 멜로디의 음악과 같은 것이죠. 이 음악에 맞춰 춤을 잘 출 수 있다면 정말 위대한 댄서가 되는 것이고요, 그렇지 않다면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만이 우리의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신은 우리에게 운명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건 '마녀의 편지'입니다. 대신,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 주겠죠. 

 

 

 

참고서적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요슈타인 가이너, "소피의 세계"

안광복,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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