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노트

[신학노트] 원죄(Original Sin) 아직도 유효한가?

설왕은 2019. 3. 21. 17:56

 

원죄는 아우구스티누스가 5세기에 확립한 기독교의 대표적인 교리입니다. 원죄는 말 그대로 인간은 원래 죄가 있다는 뜻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죄가 없는 인간은 없다는 뜻기 되기도 하고요. 그당시 서방 세계에서는 원죄라는 개념이 거의 정론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을 어떨까요? 사람들이 원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원죄를 인정하기에는 논리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사실 원죄의 핵심 개념은 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발생하죠. 

 

 

인간이 원래 죄가 있다면, 그래서 갓 태어난 아기도 죄가 있다면 그 죄는 어디서 시작하는 걸까요?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아니 성경을 모르더라도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그 죄가 원죄가 되었습니다. 아담이 지었는데 인류 전체가 죄인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거스리(Guthrie)의 책 Christian Doctrine(pp. 221-224)에 보면 이에 대해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1. 죄는 전달되었다.   

아담의 죄는 전달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아기가 생기는 부부 관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가 조성됩니다. 왜냐하면 부부 관계란 것은 결국 인간의 죄가 전달되는 과정이기도 하니까요. 사실, 그때 당시보다 지금이 이 이론이 더 합리적으로 생각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유전자를 통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후대에 전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유전자를 통해서 죄가 전달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죠. 

 

2. 아담은 인류의 대표였다.

이것은 마치 사장의 잘못은 전직원의 잘못과 같다는 개념입니다. 어렸을 때 학급에서 누군가 잘못하면 단체기합을 받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였기 때문에 우리도 같이 죄를 지은 것이다라는 원리입니다. 르네상스 이후로 인간은 한 개인이라는 개념이 발달합니다. 그 전까지는 개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고 하네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원죄에서 아담의 대표성이 쉽게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겠네요. 그당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독립된 개인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개인이라는 개념이 너무 발달한 현대에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결론적으로 원죄는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유전자를 통해 죄가 전달되지도 않을 뿐더러, 아담이 실제로 있었던 사람인지 확인할 수도 없는데 그가 우리의 대표라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우리의 대표라고 하더라도 그가 지은 죄는 그의 책임이지 그 책임이 후손에게까지 전달된다는 것은 지금 관점에서는 어불성설이죠. 

 

이와 같이 원죄의 각론에 들어가면 문제가 너무 많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원죄는 신학적으로도 거의 폐기된 이론입니다. 원죄라는 개념은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개념이고요. 

 

원죄와 같이 오래된 교리는 각론으로 들어가면 세부적인 사항에서 여러 가지 결함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왜 원죄라는 개념을 고안해 냈는지 그점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를 말했을까요? 

 

 

첫째, 원죄는 인간의 결함, 특별히 '자유롭지 않은 자유 의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왜 이러는 걸까?' 혹은 다른 사람을 보면서 '저 인간은 왜 저러는 걸까?' 생각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살이 찌지 않으려면 원리는 정말 간단합니다. 적당히 먹고 적당히 운동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못하는 걸까요? 우리는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먹을지 안 먹을지 우리는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먹을 것에 있어서 자유를 자유롭게 행사하지 못할까요? 인간의 자유 의지는 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할까요? 아우구스티누스의 답은 바로 원죄 때문이라는 것이죠. 인간에게는 원초적인 결함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 원죄는 죄에 대한 책임을 개인이 몽땅 뒤집어쓸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은 죄를 지은 한 개인만의 책임일까요, 아닐까요? 극단적인 경우로 살펴 보죠. 자살은 기독교에서 죄입니다. 그런데, 자살은 완전한 개인의 책임일까요, 아닐까요? 우리는 자살을 했지만 실상은 타살을 당한 수없이 많은 사례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고,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자살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한 사람도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죄는 그들만의 죄입니까? 원죄라는 개념은 만연한 인간의 죄된 본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죄는 개인의 죄만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타인의 죄로 인한 죄의 도미노 현상에 대해서도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 원죄 교리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해서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논쟁을 살펴 보면 좋습니다. 유명한 논쟁인데 펠라기우스 논쟁이라고 합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자유 의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지만 그 능력은 많이 훼손되었다고 주장하죠. 어떻게 보면 펠라기우스가 더 인간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절대적 자유 의지를 긍정할 때 그 이면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책임이죠. 인간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누구를 탓하거나 공동 책임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니까요. 펠라기우스의 이론은 겉으로 좋아 보이나 실상은 무서운 이론이죠. 

 

원죄를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내세운 주장은 '인간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하죠. 외부에서 오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원죄 교리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주장입니다. 외부에서 오는 도움이 하나님으로 인해 인간의 내면에서 발생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타인의 도움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원죄를 인정하면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외부의 도움을 청하는 삶의 자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비슷한 이유로, 우리는 타인을 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원죄 교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은혜가 필요한 거죠.  

 

참고로...

질문: 아담은 정말 역사상 존재했던 사람일까요?

답: 알 수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아담의 뜻 자체도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담은 역사성과 상징성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이 질문이 어리석은 이유는 아담의 역사성은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담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아담의 상징성 때문이죠. 저는 아담에 대해서는 키에르케고르의 입장과 비슷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은 최초의 인간이며, 그는 자기 자신임과 동시에 인류였다." (불안의 개념, 32) 키에르케고르는 아담을 설명하는 것은 인간을 설명하는 것이고 인간을 설명하는 것은 아담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고서적

알리스터 맥스래스, 역사 속의 신학

Shirley C. Guthrie, Jr., Christian Doctrine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