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20분설교] 나의 영혼이 잠잠히 (시편 62편)

설왕은 2019. 4. 28. 18:46

 

 

시편 62편 (개역개정)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1. 들어갑니다.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주일 아침에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평화와 은혜가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혹시 지난 주일 설교 기억하십니까? 제목은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14장 1절과 2절이었고요. 담임목사님께서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경험될 수 있다. 어떻게요? 그리스도인이 부활의 증인으로 살 때 가능합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는 제가 지난 달에 한 설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지난달 제가 한 설교의 본문은 에베소서 2장 8절이었습니다. (엡 2:8, 개정)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때 전한 설교 제목은 “구원받았습니까?”였습니다. 나중에 구원받을 것에 대한 기대보다 지금 구원받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구원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았는지, 구원받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휴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죽어봐야 알쥬.” 아니요.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은 지금 나의 얼굴에, 나의 말에, 나의 행동에 드러나야 합니다. 구원은 우리 죽음 이후의 세상과 관련이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오늘 본문

오늘 말씀은 지난 달에 제가 전한 말씀과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1절만 봐도 그렇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구원이 어디서 나온다고요? 구원이 그에게서 나온다고 시편 기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나?”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요. 그 구원을 어디서 받아야 하는지 오늘 시편 62편에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이 그에게서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유심히 살펴봐야 할 이유입니다. 시편 62편의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시편 기자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2절에 보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엄청나게 흔들리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3절에 보면 그 상황이 나와 있습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이 별로 좋지 않은데요.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넘어지는 담,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나를 너희가 죽이려고 다 같이 공격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할 거냐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성전에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위급한 상황에서 적들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9절에 한 번 보세요.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9] 신분이 낮은 사람도 입김에 지나지 아니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도 속임수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들을 모두 다 저울에 올려놓아도 입김보다 가벼울 것이다. [10] 억압하는 힘을 의지하지 말고, 빼앗아서 무엇을 얻으려는 헛된 희망을 믿지 말며, 재물이 늘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아라.”  신분이 낮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한 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신분이 높은 사람을 더 나은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 일종의 사기이고 눈가림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다 저울에 올려 놓고 무게를 재 보면 0kg이 나옵니다. 다 한 숨 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하는 힘을 의지하지 말고 뭘 빼앗을 생각하지 말고 돈을 많이 벌더라도 거기에 마음두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조언은 이렇습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말아라. 신분이 높아지면 누군가를 억압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때로는 불법적으로 혹은 합법적으로 누군가의 것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도, 혹은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을 거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 원리

- 시편 62편이 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옵니다. 방금 살펴 봤지만, 시편 62편에 보면요. 지금도 눈으로 한 번 살펴 보십시오. 상황이 안 좋으니까 하나님 저를 구해 주세요, 혹은 도와 주세요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나의 적들을 물리쳐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나의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나의 소망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뭘 안 해 주셔도 하나님이 나의 상황을 타개할 기적을 일으켜 주시지 않아도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니 그걸로 족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곤란한 상황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그 상황을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돈이 부족하면 곤란해지죠. 그러면 돈을 잘 벌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주식을 하거나 로또를 살 수도 있고요. 우리가 억울한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힘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하소연해볼 생각을 합니다. 아니면 내 스스로가 힘을 키워서 그 상황을 빠져나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진짜 구원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분이 높아진다고 돈이 많다고 인생에서 성공을 거둔다고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 그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지만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본회퍼라는 목사님을 알고 계십니까? 본회퍼 목사님은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한 조직에 가담해서 활동하다가 2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에 교수형에 처해진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감정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귀한 시간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 침묵하는 시간을 가져 본다면 여러분 어떨까요? 온갖 잡념이 다 떠오르겠죠. 일상의 근심 거리와 염려가 몰려 옵니다. 빨래도 해야 하고 밥도 지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쓰레기도 갖다 버려야 하고 애들 공부도 시켜야 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다 듭니다. 염려라는 말 자체가 그런 말입니다. 생각할 염, 생각할 려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많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걱정입니다. 그런데 그냥 잠잠히 하나님만 바란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웃겨 줍니까, 새로운 패션 트렌드를 보여 줍니까, 아니면 놀라운 뉴스를 알려 주십니까, 아니면 미래를 막 보여 주십니까? 하나님을 바라고 있으면 막 웃음이 나오고 기쁘고 그럽니까? 아닙니다. 잡생각이 나거나 아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연애할 때는 사랑하는 사람 생각만 해도 좋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생각하면 그렇습니까?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나의 삶도 휘몰아치는데요. 잠잠할 틈이 어디 있습니까? 잠잠할 기분도 안 듭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는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종교는 무엇일까요? 본회퍼 목사님은 종교는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연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럴 기분이 아니어도 이것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연습해야 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잠잠하기’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기’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삶으로 인해 충분히 만족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심지어는 기도합시다해도 할 말이 많습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이 일도 신경써야 하고 저 일도 신경써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빠이니까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금까지의 선물을 풍성히 누리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몇 시간씩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잠잠함으로 하루를 시작해 보십시오. 10분이라도 괜찮습니다. 5분이어도 좋습니다. 좀더 길게 하실 수 있으면 더 길게 하셔도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 잠잠히 있는 연습을 해 봅시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시간이 없으면 출근할 때 하십시오. 출근길에 유투브 시청하지 마시고, 뉴스 듣지 마시고, 10분 정도는 아무 것도 안하고 가는 것입니다. 혹은 설거지를 할 때도 좋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아무 생각을 안 해도 우리는 출근할 수 있습니다. 아무 생각 안 해도 내 손이 저절로 설거지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오늘 저를 또 깨우셨군요. 감사합니다. 제가 오늘 무슨 일을 해야 할까요?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누구와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기쁨을 나누어야 할까요?” 이런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자기 전에 한 번 더 하시면 좋습니다. 5분만이라도 잠잠하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조용히 하나님께 집중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저 이제 잠듭니다.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반대의 삶의 방식도 알려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안 잠잠하게 사는 법’입니다. (요일 2:16, 개정)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렇게 살면 하나님 뜻과 반대로 사는 것입니다. 밤에 일단 치킨을 시킵니다. 그리고 먹으면서 TV를 봅니다. TV를 보다가 여기 저기 채널 돌리다가 홈쇼핑에서 좋아 보이는 것을 삽니다. 분명히 내 형편에 사지 못할 일종의 사치품인데 22개월 할부로 지릅니다. 그리고 계속 또 TV를 봅니다. 그러다가 잠이 듭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모두 채우는 방법이죠. 우리 이러지 맙시다. 잠잠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연습을 합시다. 그러면 무엇을 받을 수 있다? 구원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4. 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가지 말씀만 더 전하고 오늘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고 모르시는 분들은 모르실 질문입니다. 성경에 안식일이 나오잖아요. 안식일이 언제입니까? 월화수목금토일중에요.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일주일 중 일곱번째 날이 토요일입니다. 그러면 일요일은 당연히 일주일 중 첫 번째 날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안식일을 토요일에 안 지키고 주일에 지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6일을 일하고 그 다음 하루를 쉬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하루 쉬고 그 다음 6일을 보내는 것이지요. 그럼, 뭔가 잘못된 것 같기도 합니다. 일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쉬고 시작하는 것이 좀 이상할 수 있습니다. 마치 직장 생활을 시작했는데 휴가부터 쓰고 그 다음 일하는 거랑 비슷합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볼 때는 기독교에서 일단 쉬고 시작하는 것은 잘한 것 같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6일간 일해서 피곤하니까 쉬었다가 또 일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안식일은 세상의 창조를 마친 후의 하루를 의미합니다. 완성 후의 하루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감사하고 감상하고 감탄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쉬는 날이면서 감사하는 날입니다. 노는 날이면서 동시에 감탄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언제 창조되었습니까? 여섯 번째 날이죠. 그러면 인간은 창조된 바로 그 다음날 무엇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까? 안식입니다. 인간은 감사하고 감상하고 감탄한 후에 일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일주일 중 첫 번째 날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매우 좋은 일입니다. 우리 인생 전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빨리 교육시키고 싶어합니다. 저는 반대합니다. 우리가 일주일을 잠잠함으로, 안식으로 시작하듯이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잠잠함으로, 안식으로, 혹은 노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에 삶과 생명의 기쁨을 충분히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성인이 되었을 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운이 생기고 꿈이 생기고 기쁨이 생깁니다. 제가 시를 하나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지은 학동이라는 시입니다. 학동은 공부하는 어린이라는 뜻입니다. 

 

학동

 

나무마다 새들이 노래하는 

여름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즐겁다.

사냥꾼은 멀리서 뿔나팔을 불고

나와 함께 종달새는 노래한다.

아,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헌데, 여름 아침에 학교엘 가면 

모든 기쁨이 사라지고 만다. 

늙고 무정한 한 작은 눈길 아래

어린 것들은 탄식과 낭패 속에

하루를 보낸다.

 

때때로 나는 주저앉아

많은 시간을 걱정스레 보낸다.

책 속에서도 즐거움이 없고

음울한 소나기에 닳아빠진 교실에 앉아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

 

기쁨을 위해 태어난 새가

새장 속에 갇혀 어떻게 노래를 할 것인가?

겁에 질린 아이는 

연약한 팔을 늘어뜨리고

원기에 찬 봄을 잊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버지, 어머니여,

싹들이 잘리고

꽃들이 바람에 불려가 버리면

그리고, 부드러운 봄의 나무들한테서

슬픔과 근심으로

그들의 기쁨을 빼앗는다면,

 

어떻게 여름이 기쁨 속에 솟아나며

여름 열매가 나타날 것인가요? 

그래서, 겨울 찬바람이 불 때

슬픔이 망쳐 버린 것을 우리가 어떻게 거두며

무르익은 한 해를 축복할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면 공부하는 어린이가 좋은 대학을 나오고 돈 잘 버는 직장에 들어간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합시다. 구원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훈련합시다. 어떻게요?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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