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20분설교] 에베소서 2:8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이란 무엇인가?)

설왕은 2019. 3. 31. 17:00

 

제목: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이란 무엇인가?)

 

 

본문: 에베소서 2:8 『너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오늘 본문은 짧지만 신앙의 여러 가지 핵심 요소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 믿음, 구원, 하나님의 선물 등 중요한 단어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구원에 대해서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보통 전도할 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은 정말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0년 전쯤에 그런 광고 카피가 있었습니다. "축구 선수는 축구로 구원받는다." 아마 차범근 선수가 했던 광고로 기억합니다.  구원의 의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직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축구 선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축구를 잘하는 것이겠죠. 구원의 의미가 많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이렇습니다. 구원은 결핍되어 있는 것의 충족, 혹은 갈망하는 것의 획득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축구 선수가 축구로 구원받는 이유는 축구 선수는 축구를 잘하는 것을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이죠. 구원의 사전적 의미는 건져 내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딱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구해내는 것이죠. 맞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전적 의미의 구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원을 다른 의미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는 죽고 싶어서 강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구해내는 것이 구원일까요,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죽게 놔두는 것이 구원일까요? 만약 정말 죽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살려 내거나 살려 두는 것이 구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구원해냈다고 기뻐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은 “제발 나 좀 죽게 내버려 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심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고통을 당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곤혹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빨리 그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이 구원일 수도 있습니다. 심하게 부상을 입은 동물의 경우 일부러 목숨을 빨리 끊어 주는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의미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에게 구원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던져 봐야 합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본능적으로 구원을 이해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죠.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무엇일까요?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에게 구원은 무엇일까요? 명문대학교 합격이겠죠.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에게 구원은 좋은 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어떤 구조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사회를 무슨 사회라고 하죠? 네, 맞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우리가 본능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돈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많이 가지는 것이 구원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것이 구원일 수 있어도, 교회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교회는 돈 자랑을 안 합니까? 그리스도인은 돈 자랑을 안 합니까? 우리나라의 교회들은 마치 경쟁하듯이 교회를 크고 멋있게 지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구원이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잘 믿었더니 사업에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을 크게 벌었다는 교인들을 앞에 세워 간증을 하게 했죠. 예수 믿으면 돈도 잘 벌고, 좋은 학교도 들어가고, 좋은 배우자도 만나고, 좋은 회사도 들어가고, 부자가 돼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구원일까요?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바로 구원이었습니다. 그게 잘 안 되면 교회를 떠나고 기도를 멈추죠. 그런데 예수 믿어도 우리가 원하는 구원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돈도 더 잘 벌고 좋은 학교도 잘 들어가고 연봉도 많이 받습니다. 70년대, 80년대에 우리나라에 산업화가 막 진행이 될 때는요. 교회에 다니면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술, 담배, 도박을 끊고 열심히 일만 해도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자본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열심히 일을 해도 부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자본을 가진 사람이 돈을 법니다. 그래서, 조물주 위에 뭐요? 건물주죠. 많은 사람들이 볼 때는 이제는 더 이상 교회를 다녀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그래서 이제 교회는 다른 구원을 강조합니다. 열심히 일해도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없으니까 저세상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저세상과만 관련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은 내세에서 받는 구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죠.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저세상에 가서 영원히 심판받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어?” 80년을 잘 살고 영원을 지옥불에서 보내는 경우와 80년을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도 영원을 천국에서 보내는 경우가 무엇이 더 좋은지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당연히 후자가 이득입니다. 물론, 그것이 현실화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죽고 나서 벌을 받는 경우가 있고 상을 받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그저 저세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까? 왜 그래야만 합니까? 저세상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잖아요. 그냥 상식적으로만 생각해 보죠. 지금까지 지구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이 죽고 나서 다른 곳에 가서 살게 된다면 지구보다도 훨씬 큰 공간이 필요하겠죠. 지구보다 집도 훨씬 많고 먹을 것도 더 많아야 하고 획기적인 교통수단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으니까 그 공간이 꽉 차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 가지 복잡하고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천국과 지옥이 있을 수 있죠. 그것은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 엄청난 시스템은 왜 우리가 죽고 나서만 우리에게 작동하는 것일까요? 지금은요? 우리는 지금 구원받을 수 없습니까? 지금 구원받은 삶을 살 수 없습니까? 

 

저는 내세에 천국에 가는 것도 분명히 구원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천국이 어떤 곳이든지 우리에게 좋은 곳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기만 하면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엄청난 사건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대단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인데요. 마치 카오스 이론처럼 나비의 날갯짓 한 번으로 우리나라에 태풍이 일어날 수도 있는 그런 일이라는 거죠.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엄청난 결과가 발생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는 영향이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단지 죽고 나서의 문제일까요? 왜 그렇게 나누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지금 구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세의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지 다시 돌아가 봅시다. 구원은 결핍된 것의 충족, 갈망하는 것의 획득이라는 우리의 고정관념적 정의로는 안 됩니다. 설명하기 쉽지 않은데요. 제가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 혹은 말이라고 생각되는 경우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최근에 종영한 “눈이 부시게”에서 김혜자의 마지막 대사를 살펴보죠.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낮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극중 김혜자는 알츠하이머 병으로 인해서 자신의 기억의 많은 부분을 잃습니다. 아들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죠. 그리고 행복했던 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포레스트 검프에 나온 장면입니다. 포레스트와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댄 중위는 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육체적인 쾌락만을 누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포레스트는 죽은 전우의 꿈을 대신 실현하기 위해 어선을 사고 새우잡이를 합니다. 나중에 댄 중위는 포레스트를 찾아와 같이 새우잡이를 하게 되죠. 댄 중위는 전쟁에서 포레스트 덕분에 목숨을 구했지만 두 다리를 잃습니다. 포레스트와 함께 새우잡이를 하면서 전쟁에서 받은 슬픔과 분노가 치유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댄 중위가 포레스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포레스트 자네한테 살려줘서 고맙단 말을 한 적이 없군.” 그리고 바다에 뛰어들어 평화롭게 수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포레스트가 이렇게 말하죠. “말은 안 하셨지만 하나님과 화해한 것 같았어요.” 제가 생각하는 구원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삶에 대한 절대 긍정의 자세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삶이 어떻습니까? 살아 있으니까 좋은 일도 있지만요. 나쁜 일도 많습니다. 걱정도 많습니다. 염려할 일도 많고요. 몸이 아플 때도 있고 마음이 아플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은 정말 기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별 볼 일 없는 날이 수두룩하고요. 어느 순간이 기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몸은 늙어가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이별로 인해 마음이 찢어지는 날도 생기게 됩니다. 뼈 빠지게 일해봐야 우리 가족 살 집 한 채 마련하기도 쉽지 않고 나를 인정해주고 반가워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미래에 희망이 보입니까? 그럼에도 살아야 할까요? 그래도 사는 것이 좋은 걸까요? 구원받 사람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이런 질문을 가끔 합니다.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확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확신대로 이루어질까요? 우리의 확신으로 우리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오늘 집에 가면서 로또를 한 장씩 사십시오. 1등 될 것을 확신하면서 사십시오. 될까요? 확신으로 미래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억만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의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확신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오늘 밤 죽어도 아니 지금 죽어도 "나의 삶은 축복이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살아서 너무 좋았다"고 마지막 말을 남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죽더라도 "나의 삶은 천국이었다"라고 미소를 지으며 작별을 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이 모양 이 꼴로 살지 더 나아질지 알 수 없어도 그래도 오늘까지의 삶, 지금 이 순간까지의 삶만으로도 감사하고 감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다시 던져 봅시다. 스스로에게. 나는 구원받았는가? 여러분 구원받으셨습니까?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까요? 생텍쥐페리의 “사막의 도시” 중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향해 가느냐 하는 것이지, 어디에 도착하느냐가 아니다. 인간은 죽음 이외의 그 어떤 곳에도 도착하지 않는다." (사막의 도시) 130p

 

우리의 야망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돈이 부족하시죠? 돈을 얻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자녀가 공부 잘하기를 원하시죠?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원하는 곳에 도착하는 순간 깨닫게 됩니다. '아, 이거 아닌데...' 이것이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삶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의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까? 

 

 

제가 지난주에 두 번 전도 물품을 선물 받았습니다. 하나는 언약장로교회에서 준 건빵이었고요. 다른 하나는 예닮교회에서 준 머리끈이었습니다. 전도 물품을 주시면서 그러시더라고요. "예수 믿으세요." 그래서 제가 얼른 받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예수를 믿고 있나?" 저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 그 방향이 맞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수십 년 간 교회를 다녔는데요. 제 삶은 천국의 삶이 전혀 아닙니다.”네, 그것은 교회가 잘못한 일입니다. 교회가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가 아니고, 예수님께 집중해 보십시오. 화려한 건물에 속지 마시고, 웅장한 음악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 나오시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시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눠 보십시오. 구원의 날이, 구원의 순간이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 함께 예수님께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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