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여행하기 위해 여행하라_김영하 "여행의 이유"

설왕은 2019. 8. 26. 11:26

저는 베스트셀러를 잘 읽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는 많이 팔렸다는 뜻이지 좋은 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좋으니까 많이 팔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상품이 어떠한 품질을 가지고 있느냐를 떠나서 그냥 어떤 상품을 잘 파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나 조직, 기업들이 있습니다. 온갖 포장을 다해서 상품을 팔지만, 실제로 그 상품을 구매하는 사람이 가지는 만족도는 그다지 높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살아남은 고전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품질을 검증받는 경우이지만 지금 현재에 마구 팔리는 책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죠. 그래서 베스트셀러에 대한 저의 느낌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팔린 책이 아니라 억지로 팔리고 있는 책이라는 그런 느낌입니다.

 

서점에서 들러서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읽어 보았습니다. 서점에 일부러 간 것은 아니었고 그냥 시간이 남았고 어디 가 있기도 애매하고 해서 서점에 들렀는데요. 그러고 보니 동네에 서점이 있다면 좋겠네요. 그러면 시간 남을 때 들어가서 글자들을 읽으며 상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예전에는 서점이 좀 있었는데 요새는 서점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튼, 여행의 이유는 베스트셀러였고, 저는 베스트셀러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을 가진 채 책을 펼쳤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저자가 중국에 가서 비자가 없어서 강제출국조치를 당한 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여행에 대한 환상을 자극할 만한 판타지적이고 몽환적인 글로 시작하지 않을까 싶었는데요. 여행을 좋아하기로 알려져 있는 작가의 황당한 실수담으로 시작해서 의외였지만 신선했습니다. 그 부분을 읽고 나서 이 책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역시 방송으로 인해서 친숙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일단, 집중이 잘 되더군요. '아 그래서 이랬구나. 아 이런 일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구나.'하고 이해하는 부분들이 생겨서 집중하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학자가 쓴 글이 아니니 학구적이 아니어서 좋았고 글 쓰는 사람이 쓴 글이니 글 읽는 맛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여행 선생님이 학생 가르치듯이 뭔가 가르치려는 느낌을 주지 않아서 좋았고요. 저자가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세심하게 관찰하고 표현한 문장들도 마음에 와닿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플롯이 무엇인가를 찾는 플롯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고요.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읽지 않은 이는 것의 없다고 말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아 나는 이토록 유명하다고 하는 소설의 제목도 처음 들어봤구나.'라고 생각했죠. 동양 남자에 대한 백인 여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어떤지도 저자의 글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의 이유는 무엇이냐면 저자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삶이라는 여행을 잘 하기 위해서' 정도일 것 같습니다. 여행을 잘하기 위해서 여행을 한다 정도가 될까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주제였습니다. 제 생각도 비슷하고요. 멋진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삶의 감각적 쾌락을 위해서 여행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여행을 하는 것은 지금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고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자신의 삶에 대해 더 애정을 가지고 더 좋은 자세로 살아가기 위해서겠죠. 

 

이런 글을 읽을 때 주제나 중심 생각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냥 저자의 생각과 여정을 따라가 보는 것이죠. 그의 생각을 들어보고 그의 여정과 그가 거기서 느낀 것들을 짐작해 보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입니다. 베스트셀러지만 잘 팔리기를 원하면서 쓴 책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진실함이 엿보입니다. 말 재밌게 하는 친구가 여행 갔다와서 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아요. 책을 다 읽고 나니 '우리의 만남은 매우 즐거웠다'라는 인상을 주는 그런 책입니다. 

 

인상적인 구절을 길게 옮깁니다.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고 싶은 부분입니다.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나 혹은 평범한 자신이나 혹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염두에 두면 좋을 부분입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57-58p)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스프레드시트로 표를 하나 만들어 소설을 쓸 때마다 사용한다. 비중이 있는 인물이며 그의 외모부터 습관, 취향까지 다양한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해본다. 마치 앙케트 조사와 비슷하다. 역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인물의 내면이다. 윤리적 태도, 성에 대한 관념, 정치적 성향 등, 십여 개의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하다 보면 인물에 대해 좀 더 또렷한 윤곽이 그려진다. 그런데 인물의 내면 부분에서 내가 제일 고민하게 되는 항목은 '프로그램'이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음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 같은 고정관념도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인종차별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백인은 어쩌다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룬 흑인을 만나면 '흑인이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대사를 칭찬이랍시고 치게 된다. 작가가 미리 생각해둔 프로그램이 인물의 대사가 되어 배우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 관객은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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