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노트

슐라이어마허의 "절대 의존의 감정"이란?

설왕은 2019. 11. 13. 15:06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종교를 "절대 의존의 감정"(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이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말입니다. 믿음이나 신앙을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20세기에 들어서서 슐라이어마허의 신앙에 대한 이런 정의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저는 슐라이어마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슐라이어마허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말 "절대 의존의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은 여러 가지 부정적인 느낌을 전달합니다. 

 

첫째, 의존이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20세기 초에 실존주의가 유행하면서 인간은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는 그런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죠. 타인의 누군가가 아닌 나는 나로 살아야 한다는 주장은 멋있는 주장, 시크한 주장, 쿨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이 의존의 의미를 완전히 벗어버릴 수는 없으나 그래도 협력, 공조, 도움 이런 정도가 아니라 절대 의존이라고 하니 신앙인의 주체가 사라지는 느낌이 듭니다. 부정적인 느낌이죠. 현대에는 인기를 끌기 어려운 말입니다. 

 

둘째, 감정이라는 말이 종교를 편협한 것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종교는 감정이다. 신앙은 그냥 감정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무래도 종교는 감정의 영역에서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감정 조절만 잘 할 수 있다면, 종교를 믿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뉘앙스도 풍깁니다. 그리고 종교를 믿어도 이것은 그냥 자기감정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지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닌 듯한 느낌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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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로부터 입수된 Free-Photos님의 이미지 입니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의 절대 의존의 감정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그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틸리히의 설명을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음은 틸리히의 설명에 따른 "절대의존의 감정" 설명입니다. (틸리히, 조직신학 I, 73-74)

 

감정: 무조건적인 것에 대한 직접적인 자각, 심리적인 것이 아닌, 지성과 의지,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자각

의존: 목적론적인 의존 (도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 결정론적인 것이 아님)

 

틸리히는 이렇게 설명하면 "절대의존의 감정"은 자신이 주장하는 "존재의 근거와 의미에 대한 궁극적 관심"과 비슷한 뜻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틸리히는 신정통주의가 슐라이어마허를 무시하면서 슐라이어마허 이전의 100년과 이후 100년의 신학적 발전을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비판합니다. 

 

저는 슐라이어마허를 잘 모르지만 틸리히의 설명에 의하면 "절대 의존의 감정"은 현대에도 널리 사용될 수 있는 정의입니다. 절대 의존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에 의지하면서 도덕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감정은 기쁨, 슬픔, 분노와 같은 것이 아니라 논리에 따른 이성적 지각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지각 혹은 경험을 의미합니다. "절대 의존의 감정"이 의미하는 바는 이 단어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느낌과는 매우 다릅니다. 따라서 그 의미에 맞게 단어를 모조리 바꾼다면 현대에도 유효하고 매력적인 종교의 정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초월적 자각'의 뜻인데 좀 더 멋있게 바꿀 수 있다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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