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길벗설교12] 구원은 아기 예수에게 있습니다_누가복음 2:25-32

설왕은 2020. 1. 26. 12:00

들어가는 글

안녕하세요? 설 명절 잘 보내고 계십니까? 설이라서 즐거움도 있지만 고단함도 느끼실 것 같습니다. 오늘이 설날이었으면 이렇게 모이기 힘들었을 텐데, 다행히 어제가 설날이어서 이렇게 함께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머물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유의 바람이 임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가 지난번에 한 설교의 제목은 자유롭게였습니다. 기억하시죠? 설교가 짧았다고 말씀해 주신 분이 몇 분 계셨습니다. 짧기는 짧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더 길게 할 생각이고요. 지난번 설교와 이어지는 설교로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지난번 설교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이었는데요.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오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설명

누가복음 221절에 보시면 마리아가 예수를 낳고 8일 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 40일 만에 정결 예식을 치러야 합니다. 동시에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는 예식도 함께 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낳고 베들레헴이나 그 근처에서 계속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과 가깝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후 40일이 되면 성전에서 정결 예식을 하고 아이를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160 km 정도 되거든요. 걸어가면 아마 최소 4일 정도 걸릴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낳고 자신들이 살던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아마 산후조리도 할 겸 예루살렘 근처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난 후 40일이 되었을 때 예식을 하기 위해서 요셉 가족이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요. 시므온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게 경건한 사람이었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언제 오실 것인지 눈이 빠지게,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일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소문에도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가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하고 있는데 그는 뭔가 특별한 사람인 것 같다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번씩 예루살렘에 들어오기도 했겠죠. 그런 사람이 온다는 소문이 돌 때마다 시므온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를 보러 갔겠죠. 그러나 그를 보는 순간에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으로 들어가서 정결 예식을 거행하러 온 마리아, 요셉 부부를 만납니다. 이제 40일 된 갓난아기가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는 대번에 알아봅니다. 그 갓난아기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목도 제대로 못 가누는 그 갓난아기를 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겠죠. 마리아도 당황스러웠겠지만 아기를 넘겨줍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시므온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의 빛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를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므온은 말했습니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 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아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시므온은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업적이라고는 아직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저 태어났다는 사실밖에는요. 그런데도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29~32절은 시므온의 노래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아서 성 시므온으로 부릅니다.

 

구원은 아기 예수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시므온이 본 것이라고는 가난한 부부의 평범한 아기였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내 눈이 귀여운 아기를 보았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또 누가 있을까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머리에 떠올려 보십시오. 어느 누구도 아기 소크라테스를 상상하지 않습니다.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독배를 마시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 하면서 당대의 지식인들의 거짓과 사기에 당당히 맞서는 소크라테스를 상상합니다. 이순신 장군을 머리에 떠올려 보십시오. 어느 누구도 눈감고 옹알이를 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을 머릿속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큰 칼을 옆에 차고 매서운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거북선과 판옥선을 지휘하는 이순신 장군, 적군의 총탄을 맞고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외치는 이순신 장군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유독 그리스도인들만, 유독 우리만 아기 예수님을 생각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말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를 생각하며 그 예수님을 우리는 매년 기다립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어른 예수가 아니라 아기 예수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독특한 성격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를 보며 구원을 발견합니다. 구원은 아기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의 기대와는 매우 다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영웅을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이 미국의 자본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그들이 만들어내는 할리우드의 영화를 보십시오. 이제는 이름도 알기 힘든 수많은 히어로들이 자신의 힘과 능력을 뽐내며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런 영화들은 그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영화를 보면서 즐거워합니다. 힘이, 권력이, 돈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사람들은 자신이 힘이 없어서 권력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돈과 힘과 권력이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것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과연 사람들의 이런 노력은 올바른 것일까요?

 

베데스다 못가로

잠깐, 요한복음 5장에 베데스다 물웅덩이로 가봅시다.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가에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며 거기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예수님이 찾아와서 그에게 물어보시죠. “당신이 낫기를 원합니까?” 그러자 그 병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이 움직일 때 저를 저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마치 이 병자와 같습니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잊어버린 채 다른 생각에 매여 있습니다. 이 병자가 진짜 원하는 것은 낫는 것이죠. 물이 움직일 때 자신을 그곳에 넣어줄 친구가 없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한 한 가지 치유의 방법을 실천할 수 없다는 푸념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자신의 바람은 바로 자신의 병이 낫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의 진정한 바람을 까먹고 자신의 방법에 생각이 매여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이 낫기를 원합니까?”라고 물어보는데도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방법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 삶이 불만족스러운 이유에 대해서 쉬운 대답을 하곤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권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돈을 위해서 힘을 위해서 권력을 위해서 달음질합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이 다들 그 못이 동하기를 기다리며 그 물웅덩이로 뛰어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병자도 거기에 쉽게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그 구조 속에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별생각 없이 자신도 그렇게 병이 나을 것이라고 여기고 거기에 집착하고 매달립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입니까?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던 병자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그가 그의 병을 낫게 해 줄 수 있는데 예수님에게 엉뚱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 불행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좁은 집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요? 아이들을 영어 유치원에 못 보내기 때문에 불행하십니까? 사고 싶은 옷을 마음껏 살 수 없어서 불행하십니까? 남편이 돈을 많이 못 벌어서 힘드십니까? 아니면 권력이 없기 때문에 문제입니까? 힘이 없어서 여러 가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불편한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런 점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돈도 필요하고 힘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돈이나 힘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 자체가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으로 뭐를 해야 합니까? 일단 필요한 것부터 사야겠죠.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집입니다. 그렇다면 집을 사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러면 40평 정도 되는 아파트로 목표를 정해 봅시다. 서울에 40평 아파트가 가격이 어느 정도입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겠죠. 눈에 불을 켜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돌볼 겨를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넓은 아파트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족이 편안하고 화목하게 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것이 더 본질적인 목표, 더 근원적인 욕망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느새 돈을 벌어야 한다는 집념만 가득 차서 가족 간의 화목을 내팽개쳐 버릴 때가 많습니다.

 

다시 자유에 대하여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유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보겠습니다. 자유를 제가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몸의 자유와 마음의 자유입니다. 더 중요한 자유는 마음의 자유입니다. 몸의 속박보다도 더 강력한 속박은 마음의 속박입니다. 몸이 속박을 당하더라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있고요. 반대로 몸은 자유롭지만 마음이 속박을 당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몸의 속박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속박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자유를 누리기 힘든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 안에 가장 중심에 있는 핵심에 있는 소원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에 휘둘립니다. 세상의 문법을 따라갑니다. “돈 벌어야지. 공부해야지. 취직해야지. 결혼해야지. 애들 학원 보내야지. 멍 때리고 뭐 하고 있어. 뛰어.” 돈도 벌고 공부도 하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들 학원도 보내야죠. 그런데 왜요? 왜 우리는 돈을 벌고 공부를 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들을 학원에 보냅니까?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근원적인 바람이 있습니다. 더 핵심적인 소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쫓아가다 보면 정신이 없습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습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그것도 내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면서 평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원하는 바를 알아야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야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근원적 소망은 진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되게 고리타분한 말로 들립니다. 요새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재미와 쾌락을 더 추구합니다. 재미도 좋고 쾌락도 좋습니다. 저도 재밌는 것 좋아합니다. 쾌락 자체는 그리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재미와 쾌락은 부가적인 것이지 추구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육아 때문에 항상 피곤하잖아요. 근데 애들이 웬일로 일찍 자고 갑자기 편안한 시간이 일찍 찾아옵니다. 그러면 부부가 영화를 보면서 라면을 끓여 먹는 것, 이런 것은 쾌락이죠. 즐거운 일입니다. 이게 나쁜 일입니까? , 날마다 그러면 건강을 해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런 여유와 다소 자극적인 맛을 즐기는 것은 즐겁고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쾌락 자체를 추구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쾌락을 극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일단 일부러 점심부터 굶는 것입니다. 그러면 밤에 먹는 라면이 더 맛있겠죠. 그리고 영화도 보고 싶은 영화를 꾹꾹 참아서 남겨 놓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더할수록 쾌락의 크기는 더 커집니다. 그런데 쾌락을 추구하면 항상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더 맛있는 것, 더 자극적인 것, 더 짜릿한 것을 찾게 됩니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제가 언급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충분히 예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진리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진리를 깨달아서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요. 진리를 깨달아서 성인이 되려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진리를 깨우쳐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더 근원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진리, 자유의 관계

예수님, 진리,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 말씀에 거하면 진리를 알고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와 진리와 자유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자유롭게 됩니다. 비슷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세상의 문법에 따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 안에 참된 자유와 진리가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시므온이 그랬습니다. 성경은 그를 의롭고 경건한 사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었고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아기 예수를 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연약하고 작은 아기 예수를 보면서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연약하고 작은 아기 예수입니까? 아니면 황금 왕관을 쓰고 보석으로 장식된 홀을 손에 쥐고 휘황찬란한 의자에 앉아 있는 황제 예수입니까? 여러분이 상상하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집도 없고 변변한 옷도 없어서 꾀죄죄한 몰골로 노숙자와 별다를 바 없어 보이는 예수입니까? 아니면 말끔한 옷을 입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고급 향수 냄새가 날 것 같은 품격 있어 보이는 예수입니까? 어디서 여러분은 구원을 발견하십니까? 아기 예수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노숙자 예수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약함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아기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해답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 계십시오. 계속 아기 예수를 주목해서 보십시오. 누가복음 235절에 보면 시므온이 말합니다. 예수로 인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 계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것을 쫓아가고 있는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주위 사람들을 따라 하느라 정신없었던 우리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길벗교회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합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보고 맨 처음에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 주십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시므온이 진짜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정말 원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생각할 때 그가 본 것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랜드 캐년과 같은 거짓말 같이 압도적인 광경도 아니었고, 스페인의 가우디 성당과 같은 독창적이고 섬세한 건물도 아니었고, 고흐의 그림과 같은 독특한 에너지가 넘치는 명화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작고 귀여운 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기 예수를 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구원은 아기 예수에게 있습니다. 다른 데 가지 마십시오. 아기 예수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말씀에 머물러 계십시오. 약함 가운데 능력이 있고 가난 가운데 천국이 있고 고통 가운데 참된 희락의 감각이 열립니다. 아기 예수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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