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길벗설교13]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_시편 139편 7~14

설왕은 2020. 2. 23. 11:55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설왕은TV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안녕의 의미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가 보통 설교를 시작할 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새비전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안녕하세요, 하니까 성도님들께서 아멘,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이쿠 내가 잘못했구나, 생각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데 제 마음대로 했던 것이죠. 다음에는 다른 교회에서 가서 설교할 때 할렐루야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안녕의 의미를 아십니까? 대충 느낌은 아실 것입니다. 제가 안녕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안녕은 일단 중국글자말입니다. ‘편안할 안편안할 녕’자를 씁니다. 그러니까 안녕하세요.”의 의미는 “편안하십니까,”라는 의미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서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면요. 편안할 안’ 자는 집에 여자가 있는 글자입니다. 옛날에는 집안일은 모조리 여자가 했죠. 집에 여자가 있어야 집도 정리되고 맛있는 밥도 먹을 수 있고 아이들도 잘 지내고 할 수 있으니까 집에 여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편안하다는 의미가 된 것 같습니다. 편안할 녕’ 자는 좀 더 복잡한데요. 집 안에 그릇이 있고 장정이 있고 마음이 들어 있는 글자입니다. 해석을 해 보면 집에서 장정이 그릇을 다 비웠을 때 느끼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배고픈 사내가 집에서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난 후에 느끼는 감정을 편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안녕이 되게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죠? 안녕을 풀어서 말하면 집 안에 살림하는 사람이 있어서 잘 정리가 되어 있고 아이들도 돌봄을 받고 있고 밥 굶는 일 없이 삼시세끼 잘 드시고 계시죠의 의미입니다. 안녕하세요는 함축적이고 정감 있는 좋은 인사입니다. 여러분의 안녕을 바라면서 자세히 풀어서 얘기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가지고 한참 얘기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설교하면 두 시간도 하겠습니다.

 

 

지난달 설교

지난번에는 제가 시므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알아보고 하나님을 찬양한 사람이었습니다. 설교 제목은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였습니다. 아기를 보고 그 아기가 우리를 구원할 자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었고 진리를 알고 있고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연약한 아기 예수를 보며 하나님의 능력을 감지해내는 신통력을 발휘합니다. 제가 항상 지난번 설교를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코끼리를 설명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코끼리를 자주 봐서 익숙해 보이지만 사실 코끼리는 대단히 기이하게 생긴 동물입니다. 일단 코가 매우 길고요. 이빨이 상아가 입 밖으로 매우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귀도 엄청 크고요. 몸무게도 많이 나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코끼리보다 복잡한 분입니다. 한 번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아주 자그마한 부분을 설명하게 되는데요. 그것을 듣고 어떤 분은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극단적으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코끼리의 코만 보고 전체를 다 상상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봐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알아갈 때 한 부분만 극단적으로 강조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았던 것, 들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전체 그림을 그려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본문이 주는 느낌

오늘 본문을 읽고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7절에 어디로 피하리이까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단어를 보면 시편 기자가 왠지 하나님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피하고 싶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탈출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늘 끝까지 올라가 보고 땅 밑으로 들어가 봅니다. 스올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보통 성경에서 스올이라고 하면 무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땅 속을 의미합니다. 땅 속에 들어가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런데 땅 속에 들어가서 거기에 자리를 딱 깔고 숨어 있어도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갑자기 날개가 나옵니다. 날개가 나와서 바다 끝까지 날아갑니다. 옛날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땅의 끝에는 바다가 있고 그 바다의 끝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끝을 의미합니다. 그 너머로 가면 죽는 거죠. 10절에 보면 땅의 끝에서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을 보면 이 시편 기자가 하나님으로부터 탈출하고 싶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건 간에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십니다.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보고 계십니다. 마음이 답답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의 상황을 잘 봐야 합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CCTV가 참 많죠? 요새는 자동차도 눈이 있습니다. 블랙박스가 있어서 밤에도 눈을 반짝이면서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CCTV를 봐야 하는 상황이 될 때가 있죠. 어떤 사람은 CCTV를 보는 것이 괴로운 일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CCTV가 있어서 고마울 수도 있습니다. CCTV를 범죄의 현장에 대한 증거가 될 수도 있고요, 반대로 범죄 용의자의 무죄의 증거가 될 때도 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라면 CCTV는 감시의 눈이 아닙니다. 구원의 눈입니다.

 

시편 139편의 시편 기자는 지금 매우 억울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11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완전히 캄캄한 상황입니다. 자신의 무고함을 아무도 증명해 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내가 죄인이라고 몰고 가는 상황입니다. 나를 두른 빛이 밤이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이 좋지 않아서 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12]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

 

어두워서 아무도 못 봤지만 하나님은 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능력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내장도 들여다보십니다. 심지어는 내가 엄마 뱃속에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고,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 알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포악해질 때 (광염소나타)

잠깐 제가 며칠 전에 읽은 소설의 내용을 나누겠습니다. 김동인의 ‘광염소나타’라는 소설입니다. 김동인은 감자로 유명한 작가인데요. 일제강점기에 살았습니다. 광염소나타를 읽은 이유는 2주 전에 담임목사님이 빛과 소금 설교를 하셨는데 빛과 소금을 광염, 혹은 염광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나서 갑자기 이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뭔가 제목이 무섭고 낯설어서 읽기 싫었던 소설이었는데요. 여기에 나온 광염도 빛과 소금일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 읽어 보았습니다. 광염은 그런 뜻이 아니었고요. 미칠 광에 불꽃 염을 써서 미친 듯 타오르는 불꽃 소나타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백성수라는 천재 음악가가 나옵니다. 그 아버지도 천재 음악가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해서 백성수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혼자서 백성수를 올바르게 잘 키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백성수는 별문제 없이 잘 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병에 걸리고요. 어머니의 병은 금방 낫지 않아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탕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어머니를 보다 못한 백성수는 일단 밖으로 나가는데요.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조그만 담배 가게에서 돈을 훔칩니다. 백성수의 절도는 금방 발각이 되었고 그는 도망갔지만 바로 잡혀서 현장범으로 경찰에게 끌려갑니다. 백성수는 어머니가 병에 걸려서 돈이 필요했다고 사정사정하고, 어머니에게 의사를 보낼 수 있게 한 시간만 여유를 달라고 하지만 묵살당합니다. 백성수는 결국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그 사이에 어머니는 죽습니다. 나중에 감옥에서 나와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어머니는 기어서 길에까지 나와서 아들을 찾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백성수는 그 상점에 가서 거기 놓여 있던 짚단에 불을 지릅니다. 결국 그 상점은 불타오르게 되고 백성수는 그것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흥분하면서 그의 예술성을 발휘해서 광염소나타를 즉석에서 작곡합니다. 그의 예술성은 그렇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방화, 시체 훼손, 살인 등을 저지르면서 그는 예술성을 발휘합니다. 그런 소설입니다.

 

 

백성수는 나쁜 짓을 저질렀지만 우리는 그의 행동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겠습니까? 사람이 광포해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타인에게 잔인해질 때의 마음가짐은 이런 것이죠.

 

니가 내 마음 알아?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내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너는 짐작조차 못할 거야. 내가 아팠던 만큼 너도 아파야 해. 그래도 니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내 마음이 어떤지 알지.’

 

그래서 사람이 타인에게 잔인해지기도 하고 포악해지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 이유는 되게 단순합니다. 내 마음 좀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나 좀 이해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 좀 봐 달라는 것입니다. 내 이야기 좀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타인은 내 마음을 잘 모릅니다. 그 사람이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 상황을 제대로 알고 내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아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아실 것 같습니까, 모르실 것 같습니까? 살다 보면 억울할 때가 있습니다. 분통이 터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억울함을 잘 아는 분이 계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예수님입니다. 역사 속에서 예수님만큼 억울했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새벽 날개의 색깔은?

다시 시편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시편 1399절의 표현을 좋아합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친다는 표현이 맘에 듭니다. 8절은 상상입니다. 하늘에 올라갈 수도 없고 스올에 자리를 깔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9절은 시편 기자가 진짜 경험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이 새벽 날개가 어떤 색깔일까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새벽 날개는 무슨 색깔일까요? 날개, 하면 떠오르는 단어 무엇입니까? 자유입니다. 보통 날개, 하면 밝은 색, 하얀색을 상상합니다. 파란색이나 오렌지 색깔도 예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시편 기자가 달고 있는 새벽 날개는 아마도 밝은 색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둡고 칙칙한 색깔이었을 겁니다.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어떤 남자가 새벽 3시에 30층 아파트의 꼭대기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옥상 끝까지 걸어가서 그 끝에 서 있습니다. 왜 거기에 서 있을까요? 대충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와 같이 시편 기자는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하는 그런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그런 경험을 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고 제 아내도 그런 경험을 한 것으로 보일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계속 뒤척이다가 새벽에 갑자기 잠이 확 깨면서 눈이 뜨입니다. 기분이 매우 더러워지면서 어떤 일 혹은 어떤 사람이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리고 살맛이 싹 달아납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사람이 포악해지는 순간입니다. 그 사람을 어떻게 하든지 아니면 내가 나를 어떻게 하든지 뭔가 끝장을 내야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의 막장에 다다를 때가 있습니다. 만약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런데 내가 약자라서 상대방에게 어떤 해를 가할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해하는 것입니다.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한다는 표현은 바로 그런 말을 의미합니다. 새벽 3시에 30층 아파트 꼭대기 옥상에 올라가서 옥상의 끝에 서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바로 그 순간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단단히 붙드시며 그의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다 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까지, 네가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난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돕는 배필로서 아내

한 가지 말씀만 더 전하고 마치겠습니다. 시편의 주인공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오른손이 그를 붙드는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제 잠버릇을 한 가지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저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걱정하는 일이 있으면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침대에 앉는 버릇이 있습니다. 아마도 나름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하는 상황일 것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그런 순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를 붙잡아 준 사람은 제 아내였습니다. 제가 아내의 오른쪽에서 자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앉으면 아내가 오른손으로 저를 붙잡아서 뒤로 눕힙니다. , , 하면서 말이죠.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갈 때 하나님께서 잡아 주실 때도 있습니다. 힘든 것도 그대로고 삶에 고통도 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위로가 되고, 다시 살아야겠다고 다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매번 그렇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우리 옆에 한 사람씩 붙여 놓으셨습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돕는 배필을 지어서 옆에 두셨던 것처럼 말이죠.  

 

 

성경의 창세기에 나온 돕는 배필 적극적인 주장을 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하며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키는 사람을 칭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지칭할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21 1절에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여기서 도움이 어디서 있을까라는 표현은 내가 편할 있도록 누가 비서 역할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과 능력이 있는 누군가가 능동적으로 나에게 다가와서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누가 나를 구원해줄 있을까?”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움은 구원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내는 바로 옆에서 나를 구원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아내는 누군가의 옆에서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주며 문제가 생길 중재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배우자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하면 꽉 붙잡아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옆에 한 사람을 붙여 놓으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아내가, 남편이 여러분을 붙잡으면 못 이기는 척 돌아오십시오. 내가 갈 때까지 가 볼 거야, 하고 바다 끝 너머로 가지 마시고 돌아오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을 몰라줘서 억울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세상에 어떤 어두움도 하나님께는 어둡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수고하고 애쓰고 참고 사랑하고 힘들이고 눈물 흘린 것,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옆에 있는 배우자도, ‘는 아니어도 거의 다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고 생각하며 포악해지지 마십시오. 하나님도 알고 있고, 여러분의 옆에 있는 사람도 꽤 많이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웬만하면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 가신다면 여러분을 붙드시는 누군가의 손길을 경험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 주위에 새벽 날개를 치고 바다 끝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과 함께 그분을 꽉 단단히 붙잡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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