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새비전설교]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_요한복음 8:2~12

설왕은 2020. 2. 2. 22:24

*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을 살린 예수님, 그리고 생수의 강과 생명의 빛

* 2020년 2월 2일 새비전감리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요 8:2-12, 개정)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본문 설명

8장 12절을 다시 한번 잘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 8장 12절이 그 앞부분에 이어져 있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앞부분을 보면 8장 12절에 바로 이어져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내용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8장 2절부터 11절까지의 사건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은 매우 유명한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노래도 있습니다. CCM 가수 박종호 씨가 부른 “바닥에 새긴 사랑”이라는 노래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한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물어보죠.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유명한 말씀이죠. 교회 안 다니시는 분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문장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어른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모두들 떠납니다.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여인과 예수님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라고 나와 있고 13절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기 시작합니다. 떠나 버린 바리새인들이 갑자기 다시 생겼죠. 따라서 12절 이하의 내용은 그 앞부분과 이어져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12절에 예수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리새인들이 이 내용에 관한 질문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내용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장의 유효성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의 내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주장의 내용에 대해서 그 의미를 파악하려면 12절 이하 부분이 아니라 그 이전 부분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 부분은 시간적으로는 12절과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다른 때 일어난 일을 중간에 끼워 넣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책은 역사책이나 과학책이 아닙니다. 꼭 시간 순서대로 사건이 서술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책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서술한 것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시간상으로는 앞뒤 사건과 이어지지 않지만 앞뒤의 내용을 더 잘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요한복음의 저자가 붙여 놓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우리가 다른 사람들 뒷담화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예의가 없고 성격이 진짜 이상하잖아.” 그렇게 누군가가 뒷담화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나도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을 겪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 대화에 끼어들겠죠. “맞아, 맞아. 나도 몇 달 전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거든. 나는 그때 내가 뭘 잘못했나, 했는데 아니었네.” 이런 식으로 시간적으로 몇 달 전 일이 갑자기 끼워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화가 들어가서 그 사람이 예의 없고 이상하다는 의견은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이와 같이 시간적으로 8장 12절과 떨어져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8장 12절은 시간적으로 언제 일어난 일일까요? 성서학자들은 7장 39절의 바로 다음에 8장 12절이 나오면 굉장히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봅니다. 7장 10절부터 39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이 나옵니다. 37절부터 39절까지 읽어보고 12절을 이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8:12]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어떻습니까?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습니까? 7장 40절부터 52절까지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과 관련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갑자기 이 사이에 끼어든 것일까요?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생수의 강과 세상의 빛

예수님의 말씀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참 어려운 말씀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배를 한 번 보십시오.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세상의 빛은 태양 아닙니까? 이 곳에서 빛은 천장에 있는 형광등 아닙니까? 이 불을 끄면 우리는 어둠에 다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빛은 모든 사람에게 비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어둠에 다닐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배에서는 생수가 안 나오고, 빛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비추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일화가 여기에 끼어 들어간 것입니다.


음모의 현장

오늘 사건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고 생각해 봅시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나와 있지만 사실 이 사건에는 음모가 있었습니다. 간음하다가 잡히면 돌로 치라고 성경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 음모가 있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여러분 간음하는 장면을 목격하신 일이 있습니까? 누군가 바람피는 것 같은 장면을 목격하신 일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배우자가 있는 사람인데 다른 여자 혹은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장면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웃고 있는 것이 간음은 아닙니다. 간음의 의미를 아시지요? 간음은 은밀한 장소에서 몰래 일어나는 일입니다. 현장을 덮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두 사람을 미행하거나 혹은 어쩌면 의도적으로 함정을 파서 걸려들게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현장 발각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서 간음하다 잡힌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즉결 처형을 받은 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간음하다 현장에서 발각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근처에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발견된 여인을 잡아온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예수님께로 끌려왔습니다. 뭔가 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우연이라고 한다면 너무 심한 우연입니다. 뭔가 냄새가 나는 일입니다.

둘째, 사람들은 간음한 여인만을 잡아왔습니다. 간음은 혼자 짓는 죄가 아닙니다. 상대방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같이 잡아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인만을 잡아왔습니다. 두어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남자가 도망쳤을 수 있습니다. 둘 다 잡으려고 했는데 남자는 도망쳐서 여자만 잡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 여인에게 더 엄격했을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잘못했지만 이런 경우 여자가 더 잘못했다고 여기는 사회, 문화적인 분위기 때문에 여자만 잡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남자가 그들과 같은 편일 수도 있습니다. 즉 그 여인을 꼬셔서 간음하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 남자를 미끼로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4절, 5절, 6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그들의 관심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고발해서 그를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을 비롯한 사람들은 이미 사람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습니다.


진퇴양난의 상황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들의 위치와 권위가 흔들리게 되자 그를 없애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영향력을 없애는 두 가지 방법이 있죠. 예수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거나 혹은 그를 실제로 죽이면 됩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을 가져다가 예수를 흔들고 그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결국 그를 없앨 수 있는 모략을 세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예수 앞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물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사건은 예수님을 쓰러뜨리기 위한 함정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 여인을 돌로 치지 말라고 명령했다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받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고발했을 것입니다. 함부로 용서를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이 여인은 현장에서 검거된 현장범이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누누이 말하고 강조했던 자비, 은혜, 용서, 동정심과 같은 가르침들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로 치라고 했다면 사람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통해서 차가운 하나님을 느꼈다면, 예수님을 통해서는 따뜻한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다면 그 따뜻함은 한 순간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했다면 또다른 문제도 발생합니다. 누군가를 죽이라는 선고는 이 당시에 유대인은 내릴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형 선고는 로마의 재판관만이 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내렸다면 실정법 위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가운데 놓였습니다.


몸을 굽히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들에게 바로 대응하지 않고 갑자기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무엇을 쓰셨는지 사실 아무도 모릅니다. 오랜 교회 전통에 따르면 예수님은 예레미야 17장 13절을 쓰셨다고도 하는데요.

(렘 17:13, 개정)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이 말씀은 앞뒤의 내용을 볼 때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중에 천국 가서 예수님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몸을 갑자기 굽히셨을 때 많은 사람이 궁금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 하시려고 것일까, 하고 궁금증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엇을 쓰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 봤습니다.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무엇을 쓰시고 나서 왼손에는 큼지막한 돌멩이를 하나 들고서 일어나시는 거죠. 만약 그랬다면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면서 예수님을 주목했겠죠. 긴장감이 팽팽했을 것입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제 저 여자는 죽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내심 자신들의 작전이 성공했다고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다른 사람들이 눈치 못 채게 음흉한 웃음을 웃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외쳤겠죠.

‘던져라.’

예수님이 왼손에는 돌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제가 이런 상상을 한 것은 이 ‘먼저’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해”라고 말을 할 때 그 말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그럼 내가 뒤이어서 할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돌을 손에 쥐고 계셨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 쳐. 그러면 나도 뒤이어서 돌로 칠게. 그런데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쳐.”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몸을 굽혀서 땅바닥에 무엇을 쓰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한 사람씩 떠납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도 모두 떠나고 그 여자와 예수님만 남게 됩니다. 조금 전에 사람들은 의기양양해서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나쁜 여자를 바로 처벌해야 공동체의 기강이 바로 잡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이런 악한 일이 다시금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지시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는 법의 수호자들이었고 선한 무리라고 스스로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명하시자 서서히 그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빛을 비추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는 말씀은 마치 “너희는 그 여자를 돌로 칠 자격이 없다. 너희들도 죄인이면서 누가 누구를 정죄하느냐.”라는 뜻 같습니다. 그런 뜻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의 의도는 좀 다릅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는 벌을 내리는 사람은 죄가 없어야 한다면 세상에 처벌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타인에게 벌을 줄 수 없습니다. 히틀러는 나쁜 사람입니다. 악마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죄가 있지만 히틀러를 정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에 따라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누군가를 정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법과 제도를 통해 나쁜 사람에게 처벌을 내릴 수 있습니다.

죄 없는 사람만이 죄 있는 사람을 처벌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그 여자를 돌로 칠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너희는 벌할 자격이 없고 나는 자격이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생명의 빛이 그들에게 비추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무리들이 거기서 하려고 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적어도 둘 중에 한 명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여인을 죽이든, 아니면 예수를 죽이든, 아니면 둘 다 죽이든 그들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그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예수님께서 명하시자 그들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자신에게 있는 죄를 보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죄 있는 자가 돌을 들어서 또 다른 죄인을 죽이려는 그들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간음한 여인은 잘못했습니다

간음은 죄입니다. 그 여인이 음모나 계략에 빠졌을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그 여인이 잘못한 것입니다. 간음을 금하는 모세의 율법은 원칙적으로 올바른 법입니다. 그러나 율법, 혹은 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고 사람들이 더 사람답게 살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세의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음하는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의 목적은 범죄자를 죽일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간음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죽여도 돼”가 아니라 “이런 짓을 하면 안 돼”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몰려온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은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며 흥분해서 누군가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을 그들 스스로 보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배에서는 무엇이 나오고 있습니까?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고 싶지는 않은데요. 오늘 본문에서 보면 이들의 배에서 무엇이 나오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배에서는 죽음의 강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배는 우리의 욕망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머리는 이성, 가슴은 감성, 배는 우리의 욕망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들의 욕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이웃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왜 이런 욕망이 있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동물적인 욕망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경쟁자가 죽어야 생존의 확률이 높아지는 동물적 본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동물의 왕국과 같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시면 그런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의 배에서 죽음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웃이 죽어야 내가 살 것처럼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들의 이웃을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려고 광분해 있으면서도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이런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왜, 아침에 출근하려고 알람을 맞춰 놓잖아요. 그런데 너무 피곤한 날은 아침에 알람이 울리면 무의식 중에 자연스럽게 알람을 끄는데요. 그리고 한참 있다가 일어나서 시계를 보면 그때 깜짝 놀랍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그때 알아차립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마치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그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겠다고 윽박지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갔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여인을 살리셨습니다.


예화

예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한 쌍의 부부가 유람선에서 해상재난을 당했습니다. 유람선이 가라앉게 되었고 구조정에는 자리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때 남편은 부인을 남겨두고 혼자 구조선에 올랐습니다. 침몰하는 배 위에 남겨진 부인은 남편을 향해 애타게 소리쳤습니다.

배는 침몰했고,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수군 그 남편을 욕했습니다. 자기만 살려고 아내의 외침도 무시하고 혼자 구조정에 올랐다고요. 이기적이고 매정한 사람이라고 상종 못 할 인간이라고 비방했습니다. 그 남자도 몇 년 후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 남자의 딸이 아빠의 유물을 정리하던 중 아빠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나는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배여행을 갔을 때 엄마는 이미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있었고, 그때 마침 사고가 일어나 어쩔 수 없이 아빠가 구명정에 올라탄 것이었습니다. 아빠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 때 나도 당신과 함께 바닷속에서 죽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지. 우리 딸 때문에, 당신만 깊고 깊은 해저 속에 잠들게 밖에 할 수 없었어. 미안해 여보"

배위에서 부인이 남편에게 소리친 말은 "여보, 우리 딸 부탁해요" 였습니다

혼자 살아남은 남편을 매정하고 이기적이라고 욕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일은 우리가 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세한 사정은 알아보려 하지 않고 타인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험담하고 욕하고 미워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달려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배에서 무엇이 나오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

사랑하는 새비전교회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혹 그녀에게는 병이 든 남편이 있고 자녀들이 굶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몸을 팔면 돈을 주겠다고 유혹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지금 간음한 여자를 두둔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간음은 잘못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을 죽여야 합니까? 간음한 여자를 죽여야 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죄인을 죽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할 때 “너희의 죄 때문에 내가 너를 죽여야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을 우리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죄를 들춰내서 죽이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 대신에 그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셨는데 우리는 죄인을 찾아내서 그 사람을 죽인다면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도 또한 우리의 이웃을 살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고 어둠 가운데 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십시오. 지금도 어둠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더 잘 살겠다고 타인을 밟고 죽이면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둠 가운데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의 배에서 나오는 죽음의 강으로 자신의 이웃을 익사시키려는 어리석고 무시무시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생명의 빛 가운에 머물러 계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이웃을 보실 때, 그 사람이 설령 심각한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고 바라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서 다른 사람을 살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고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배에서 나오는 생명의 강으로 우리의 이웃을 살리고 살리고 또 살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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