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길벗설교14] 나쁜 놈, 믿음, 그리고 걱정_시편 139편 15~24절

설왕은 2020. 3. 1. 11:55

( 139:15-24, 개정)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19]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20]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2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22]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지난주 설교

안녕하세요. 안녕하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요새는 갇혀 있는 느낌입니다. 어디라도 나가려고 하면 마음이 꺼림직해서 나가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교회에 와서 여러분들 얼굴 보니까 좋습니다. 참 반갑습니다. 원래 오늘 제가 설교할 순서가 아닌데요. 담임목사님께서 허리가 아프셔서요. 제가 대신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담임목사님 연락을 받고 고민을 좀 했습니다. 제가 매주 설교를 했다면 성경에 책 한 권을 정해서 강해 설교 형식으로 매주 설교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한 달에 한 번 설교하니까 강해 설교하기에는 간격이 너무 길어서요. 본문을 매번 정해서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본문 정하는 것 자체가 고민거리입니다. 그래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고, 제가 밥 먹고 하는 일이 성경 보고 책 보고 생각하고 글 쓰고 그런 일이니까 한두 주 정도 지나면 전하고 싶은 말씀이 항상 생겼습니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에 목사님께서 연락 주셔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셔서 갑자기 고민이 되었습니다. 일단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는 시편 139편을 한 번 더 설교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본문을 택해서, 지난 주일 설교가 다분히 감성적이었는데 이번 주일 설교는 좀 더 이성적으로 갈까 생각을 했습니다. 고민하다가 전자로 결정했습니다. 즉 시편 139편을 다시 한 번 보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다행히 지난 주일에 제가 시편 139편 전체를 설교한 것이 아니라 전반부만 설교했기 때문에 후반부를 다룰 수 있을 것 같았고요. 또 제가 시편 139편 설교하고 그 안에 머물면서 지난 한 주를 보내고 있었거든요. 말씀을 통해서 위로와 힘을 받고 있어서 시편 139편에 좀 더 머물고 싶었습니다.

 

시편 139편은 탄식시입니다

제가 시편 139편을 설교하려고 마음먹고서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몇 주 전 이야기입니다. 시편 139편을 가사로 하는 찬양이 있는지 찾아보려고요. 송정미 씨가 부른 찬양은 정말 옛날부터 알고 있었고요. 다른 찬양이 나온 것이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조회수가 엄청 높은 것이 있었습니다. 시편 139편이 유명하니까 또 다른 찬양이 나올 만하죠. 기대를 가지고 들어 보았습니다. 제이어스의 라이브 워십 동영상이었습니다. 나보다 나를 잘 아시는 주님.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가겠나이까 이런 찬양이었는데요. 소리는 훨씬 세련되었어요. 편곡도 더 대중적이고 악기 소리도 더 좋았습니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 듣고 중지했습니다. 왜냐하면요. 이 시편은 박수를 치면서 부를 만한 시편이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설명한 것처럼 시편 기자의 상황은 어두움 그 자체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시편 기자에게 손가락질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달려드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는 것은 아름다운 여행이 아니라 불길하고 우울한 비행이었습니다. 시편을 그 내용에 따라서 몇 가지 종류로 구분을 하기도 합니다. 그 구분에 따르면 시편 139편은 ‘탄식시’입니다. 탄식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 아이고 죽겠다,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는 것이 탄식입니다. 시편 139편은 탄식시입니다. 송정미 씨가 부른 내가 새벽 날개를 치고는 시편 기자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를 예고하면서 옛날에 나온 송정미 씨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기 편한 찬양은 아니었습니다. 불러 보니까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마지막 호소

성경을 보겠습니다. 15절과 16절을 보시면 앞에 내용과 잘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체를 알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형체가 제대로 갖추어지기 전에 혹은 그 형체가 보이기도 전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형체를 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16절에 보면 자신이 태어나서 하루도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주님의 책에 다 기록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대한 찬양이 아닙니다.하나님, 대단해요.”가 아니라 하나님은 아시죠?”의 표현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자신의 최후의 증인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못 봤지만 처음부터 알고 있고 죽 지켜보고 있었던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과 18절을 보겠습니다. 17절에 보면 보배롭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좀 어색합니다. 영어로는 preciou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소중하다는 뜻이죠.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해 주는 것이 정말 소중하다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의 수가 많다고 찬양합니다. 여기서는 시편 기자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로 자신을 생각해 주셨는데 그 수를 세려고 하니까 모래보다도 많다고 흡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18절의 전반부까지는 꿈입니다. 꿈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갔는데 거기서 나를 붙잡는 하나님의 오른손을 경험한 것입니다. 거기서 감동을 먹고 하나님을 생각해 보니 마음에 평화가 넘치고 안전한 느낌도 들고 감사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딱 깨어납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을 하죠.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사실 시편 기자는 절망을 품고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간 것이었는데요. 거기서 그를 붙잡는 하나님의 손을 경험하면서 아름다운 비행이 되었습니다. 그 비행을 마치고 잠이 딱 깬 순간에도 그 감동의 여운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죠. 세상에는 나쁜 놈들이 여전히 드글드글한 것입니다. 나를 죽이려고 마음먹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쫙 깔려 있는 것입니다.  1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이것은 시편 기자의 바람이기도 하고 또한 그의 믿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악인을 죽여 달라고, 또한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을 떠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면서 또한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그 나쁜 놈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설교 제목을 일부러 나쁜 놈이라고 했는데요. 나쁜 사람인데 굳이 나쁜 분이라고 예의 바르게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도 시편 기자에게 감정 이입을 좀 해서 나쁜 놈이라고 그냥 썼습니다. 아마 설교 제목이 아니었다면 좀 더 감정을 실어서 더 센 말로 했을 것 같은데요. 설교라서 좀 참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나쁜 놈들을 설명합니다. 하나님, 그들은 하나님을 나쁘게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합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쁘게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렇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제가 지금 누구를 딱 집어서 얘기하지 않아도 여러분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누군가를 해하고 죽이기를 원하는,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자신의 증오에 대해서 정당화하는 발언을 합니다. 시편 기자는 그 나쁜 놈들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요. 그 나쁜 놈들이 하나님을 미워하니까요. 그 나쁜 놈들이 하나님을 대항해서 들고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놈들을 내가 미워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22절에 보면 노골적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그들을 너무너무 미워합니다. 그 나쁜 놈들은 나의 원수입니다.” 여기까지 잘 이해하셨지요?

 

이상한 마무리

그런데 23절을 보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나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샅샅이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나를 샅샅이 살피되 내 마음까지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마음까지 조사하려면 힘듭니다. 마음까지 살펴보는 면접을 심층 면접이라고 하죠. 그러려면 정말 철저하게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를 들여다보고 대화도 해 보고 떠보고 그래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나를 시험해 보라고도 요청합니다. 그리고 나의 뜻, 나의 생각을 알아 달라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여기서는 그냥 뜻이라고 나와 있지만 히브리 원어로 볼 때 걱정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 기자는 여기서 자신이 걱정하고 있는 바를 하나님께 알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시편 기자가 하고 있는 걱정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에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는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악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나쁜 , 믿음, 그리고 걱정

시편 139편의 후반부를 저는 세 단어로 요약하겠습니다. 나쁜 놈, 믿음, 그리고 걱정입니다. 세상에는 나쁜 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쁘게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막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피 흘리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쁜 놈들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나쁜 놈들을 제거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나쁜 놈들을 벌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정의를 구현하시고 악인을 처벌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갑자기 걱정이 생겼는데요. 혹시 자신이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나쁜 마음을 품고 나쁜 짓을 할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불안했습니다. 그러니까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악한 마음이나 행위가 있는지 조사해 주시고 악한 길을 떠나 영원한 길로, 하나님의 길로 인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걱정 있으시죠? 요새는 온 나라가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온 나라에 어두운 기운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병에 걸릴까 봐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좀 걱정이 됩니다. 코로나 19에 감염되어서 죽을까 봐 걱정되는 것보다 병에 걸리면 격리될까 봐 걱정입니다. 또 저 한 사람 감염되면 우리 교회도 폐쇄되고 제 아내가 다니는 직장도 폐쇄되고 그럴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감염되면 안 되겠죠. 그 외에도 우리는 여러 가지 걱정을 합니다. 먹고살 걱정을 늘 하죠. 돈을 벌어야 먹고살 수 있으니까요. 돈 벌기도 쉽지 않고요. 아이들 걱정도 합니다. 방학 때 저는 오랫동안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계속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걱정이 됩니다. 공부도 좀 하고 할 일도 좀 하고 놀아야 할 텐데, 계속 놀기만 하는 아이들을 보면 걱정이 됩니다.

 

시편 기자의 걱정은 우리의 걱정과 차원이 다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에게 혹시나 나쁜 놈이 하는 생각과 나쁜 놈이 하는 행동이 있을지 그것에 대해 걱정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나쁜 행위가 있는지 보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해 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번역에서는 나쁜 행위가 아니라 나쁜 길로, 영어성경 NIV에서는 offensive way로 공격적인 길로, NRSV에서는 wicked way로 사악한 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원어로 봐도 행위가 아닌 로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영원한 길과 나쁜 길을 대조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나쁜 놈이 자기를 죽일까 봐 혹은 해할까 봐 걱정하는 것보다 자신이 나쁜 길로 갈까 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걱정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쁜 놈에게 벌을 주실 것이라고 굳건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의롭게 다스리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나쁜 놈들이 잘 먹고 잘 살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혹시 그 나쁜 놈들처럼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행동을 하는 부분은 없는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걱정은 보통 신앙인의 걱정과는 매우 다릅니다.

 

사실 악한 사람들을 상대하면 나도 악해지기 쉽습니다. 나쁜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은 그들도 나쁜 사람처럼 되기 쉽습니다. 나쁜 사람이 나에게 쌍욕을 하는데 예의 바르게 존댓말을 쓰기는 어렵습니다. 나쁜 사람이 칼을 꺼내는데 무방비로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나쁜 사람이 나를 때리는데 맞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아직 민주화되지 않는 나라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는 사람들은 독재자의 공권력에 의해서 구타나 고문을 당하기도 하는데요. 계속 폭력을 당하면 민주화 투쟁을 하는 사람 스스로도 자연스럽게 폭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상담가들도 비슷하죠.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주로 상대하는 상담가들은 자신들의 정신 건강에 위협을 받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한 조직에 가입해서 활동하다가 발각되어서 교수형을 당한 본회퍼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는 신학 천재라고 불리던 목사님이었습니다. 저는 본회퍼 목사님의 결정에 대해서 계속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 같은 악인이라면 정말 빨리 제거해야 전인류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으니까요. 세상에 죽어도 마땅한 사람을 뽑으라면 히틀러가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에 본회퍼가 틀렸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본회퍼의 논리가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전혀 엉뚱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고 본회퍼가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던 그 결정은 물론 공익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잘못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본회퍼 목사님도 나쁜 놈들과 오래 같이 있다 보니까 비슷한 논리를 사용하게 된 것 같습니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반대로 내가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고 싶겠습니까? 시편 139편이 시작하는 지점을 보면 다윗의 시라고 쓰여 있습니다. 다윗의 시라고 쓰여 있다고 해서 이 시편이 꼭 다윗이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아니라는 증거도 많이 있습니다. “다윗의 시라고 쓰여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다윗과 관련이 있는 시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저는 시편 13923, 24절을 보면서 다윗이 떠올랐습니다. 사울 왕이 갖은 수를 써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우연한 기회가 생겼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종을 자신의 손으로 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반대로 내가 죽이면 법적으로 그것은 정당한 방어권 행사로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때 당시의 법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법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방위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나쁜 놈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 저 나쁜 놈을 조사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을 조사해 달라고 말합니다.

 

 

높은 신앙의 단계로

사랑하는 길벗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는 분이시라는 믿음, 하나님께서 악인의 악을 제거하실 것이라는 믿음, 하나님께서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를 미워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악인을 처벌하고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마음이 급해집니다. 마음이 급해져서 나쁜 놈을 빨리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당한 절차 없이 폭력을 사용하고 싶어 지죠. 그러면 또 다른 악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을 제거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악으로 악을 갚는 순간, 우리의 악은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결국 승리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시편 139편에서 시편 기자가 마음에 품었던 그 걱정을 하는 신앙의 단계로 올라갑시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틀렸고 불의하다는 것은 정말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들은 조사받을 필요도 없이 나쁜 놈들입니다. 나쁜 놈들의 악한 행동을 막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피를 보는 방법으로 정의를 구현한다면 우리도 똑같이 나쁜 놈이 되는 것입니다. 나쁜 놈을 막기 위해 우리가 나쁜 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나쁜 놈들 사이에 살면 우리도 나쁜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우리가 악해지지 않도록 우리를 살펴봐 달라고 그것을 위해서 걱정하고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어느덧 공격적이고 사악한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그 길로 가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도 없이 그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나를 조사해 달라고 샅샅이 살펴봐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쁜 길로 가기 쉬운 이 세상에서 영원한 길로, 하나님의 길로 함께 걷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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