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박완서 "대범한 밥상"_흥미로운 제목에 낚였다, 하지만 낚이길 잘했네_

설왕은 2020. 2. 6. 23:21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이 단편 소설이 담겨 있는 책을 찾았습니다. 도서관에서 한참을 찾아서 "대범한 밥상"을 받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친절한 복희 씨"라는 제목의 책에서 대범한 밥상」을 발견했습니다. 밥상 얘기가 언제 나오나, 어떤 밥상이길래 대범한 밥상이라고 하는 것일까, 하는 궁금한 마음에 한 장 한 장을 넘겼죠. 제목으로 봤을 때 유쾌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밥상은 좋은 것이죠. 저는 밥상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좋은 상 중에 하나라고 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범한 밥상이니 어떤 밥상일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대범한"이라는 형용사는 밥상과는 어울리는 않는 말입니다. 밥상과 어울리는 형용사는 고마운, 맛있는, 친절한, "소박한"과 같은 단어일 것입니다. 

 

저는 이 책으로 보았습니다

 

예상과는 다르게 불행한 일로 시작하더군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할머니가 주인공인 '나'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몇 해 전에 남편을 잃었고요. 남편도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몇 달의 삶을 바쁘게 움직이며 마지막 삶을 정리했습니다. 주인공은 그 모습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아서 어떻게 몇 달의 삶을 살아가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주인공의 남편은 회계사였기 때문에 정말 최대한 공평하게 자신의 유산을 아내와 자식들에게 분배해 주고 떠났는데요. 돈에 밝은 남편과는 달리 주인공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남편은 재산이 많은 자식과 재산이 작은 자식의 상황을 고려해 모든 자녀들이 비슷한 재산을 가지도록 재산을 분배했는데 이것 역시도 분란을 일으키고 자식들 사이의 우애에 금이 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또 고민하게 됩니다.

 

마침 주인공은 경실이라는 한 사람을 생각해 내는데요. 경실이는 주인공의 고등학교 동창생입니다. 그는 엄청난 스토리를 가진 친구였습니다. 경실이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요. 딸이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 딸이 남편과 해외 여행을 갔다가 비행기 사고로 부부 모두 사망합니다. 이 다음 이야기는 읽어 보실 분들을 위해서 생략하겠습니다. 

 

주인공은 경실이의 엄청난 스토리를 주변 사람으로부터 듣고 상황 판단을 하고 경실이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경실이는 해괴망측한 행동을 했지만 아예 설명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나름 경실이가 그렇게 기괴한 삶을 산 이유를 짐작해 봅니다. 자신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고 자신의 삶, 특별히 재산을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이 되기도 하고 경실이가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찾아갑니다. 주인공은 경실이의 기괴한,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그로테스크한 행동의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봅니다. 그래서 제목이 '대범한 밥상'입니다. 함께 밥을 먹으며 물어보기 힘든 것을 대범하게 물어보죠. 경실이는 주인공의 짐작과 주변에서 들리던 소문과는 다른 진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소박한 소반 ( "사랑해설"의 삽화에서)

 

대범한 밥상삶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되는 소설입니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주인공이 자신에게 남은 서너 달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했다가 어느덧 경실 할머니의 기구한 이야기를 듣게 되지요. 박완서 작가가 상상해서 쓴 소설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인지 모르겠는데요. 경실 할머니의 얘기는 매우 기괴하고 해괴망측하고 남사스럽기는 하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경실이의 마지막 대사에서 제 마음에 박힌 단어가 하나 있었습니다. 

 

"교신(交信)"

 

익숙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단어인데요. 교신은 보통 편지로 서로 연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실 할머니가 집착에 가깝게 빠져 있는 일입니다. 손주들과 함께 가슴을 울렁거린 추억을 담은 사물이나 광경이 있으면 찍어서 손주들에게 전송하는 일에 푹 빠져 있습니다. 잊지 말라고요. 경실이는 그것을 스스로 '주접'이라고도 부릅니다. 경실 할머니는 지금 교신하기 위해서 살고 있어요. 그리고 그 교신을 통해 손주들에게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소설의 끝에서 저는 이 단어가 마음에 들어오면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깨닫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가도 똑같은 것을 저에게 시도하고 있었네요. '교신'이요. 인생이 무엇인지 저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박완서 작가 (1931-2009)

 

사람이 왜 사는지 확실히 아는 분 있습니까? 없을 걸요. 그렇다면 사람의 존재 이유를 확실히 아는 철학자나 신학자가 있습니까? 어떤 이들은 확신에 차서 말하기도 합니다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주아주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사람의 존재 이유가 쉽고 단순할 리가 없잖아, 사람이라는 것이 복잡한 고등 동물이니까 말이지,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는데요. 때로는 매우 그럴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고수는 경실 할머니와 같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말을 해서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 그냥 살아내는 사람이요. 물론 사람이니까 과오도 있고 흠 없이 깨끗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요. 눈에서 초롱초롱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박완서 작가는 '초롱초롱'과 '아귀아귀'라는 단어로 경실이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이 소설에서 처음에는 다 같이 나쁜 말로 쓰입니다. 처음에는 아귀아귀가 강조되면서 초롱초롱이 같이 나쁜 말이 됩니다. 나중에 경실 할머니의 초롱초롱과 아귀아귀가 무슨 일을 해냈는지 알게 되면서 초롱초롱이라는 단어가 더 부각됩니다. 박완서 작가의 신통한 재주입니다. 좋은 말을 나쁘게 썼다가 나중에 나쁜 의미를 튕겨내 버리고 좋은 의미를 더 살리는 능력을 보여 줍니다.

 

인생에 바람이 불 때 바람으로 인해 자빠져 버리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 안 그래도 인생 힘든데 더 어려운 일 생기면 이때다, 하고 그냥 쓰러져 버리는 것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바람이 불 때 더 또렷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의 마음도 이상하게 뜨거워지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떠오르죠.  

 

"대범한 밥상"의 주요 소품 중 하나인 자전거 ㅋㅋ

 

제 생각에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을 리가 없어요. 지어냈다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해요. 분명히 누군가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도 놀랐겠죠. 기억하고 기록해서 썼을 겁니다. 그리고 주인공과 경실이의 대화 내용을 보면 두 사람은 많이 배운 분들이고 또 문학에도 관심이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완서 작가는 이 소설에서 작가라기보다는 기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아주 특이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작가가 대범하게 물어봤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생각해 보니 꽤나 용감했던 것으로 기억하여 '대범한 밥상'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경실 할머니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 대범한 박완서 작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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