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으로 응답하라

[주기도문] 0_2/4_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_우리 아빠

설왕은 2019. 11. 22. 10:46

우리 아빠

주기도문에서 아빠 다음 단어가 바로 ‘우리의’라는 소유격 단어입니다. 쉽게 번역하자면, 주기도문은 ‘아빠, 우리 아빠’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죠.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주기도문은 개인기도가 아닌 공동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면 주기도문의 정신에 어긋날까요?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개인이 홀로 기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기도문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주기도문을 하더라도 공동체와 분리된 단독자로서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아빠’라는 표현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우리에게 엄마는 항상 ‘우리 엄마’, 아빠는 항상 ‘우리 아빠’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말에는 공동체 정신이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주의 문화가 팽배해 있는 서구 사회의 경우에는 ‘우리 아빠’라는 표현이 다소 낯설고 생소한 개념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영어에서는 엄마, 아빠를 우리 엄마, 우리 아빠가 아닌 내 엄마(my mother), 내 아빠(my father)로 표현하죠. 논리적으로는 내 엄마, 내 아빠가 맞는 말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 엄마”라고 말한다면 엄마는 나의 엄마이면서 동시에 내 친구의 엄마라는 의미인데요.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죠.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언어 습관은 우리 문화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항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인정하고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엄마’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 귀한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을 책임지고 돌보고 사랑하는 우리 공동체의 엄마를 뜻합니다. ‘내 딸’이 아니라 ‘우리 딸’이라는 표현은 단지 나의 자식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함께 키우고 돌봐야 하는 우리 모두의 자식이라는 의미이겠죠.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아빠 하나님입니다.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우리 딸, 우리 아들이라는 말을 쓰는 우리나라는 예수가 꿈꿨던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일부 사용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빠가 아닙니다. 우리의 아빠입니다. 

 
 
 

초월적 공간으로서 하늘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원래의 주기도문에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아마도 나중에 초대교회에서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을 덧붙여 넣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그렇게 된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정말 원래 주기도문에 하늘이라는 말이 없었는데 어떤 이유로 인해 하늘을 추가해 넣었을 수도 있고요. 둘째, 제자들마다 기억이 달라서 어떤 제자는 하늘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으로 기억하고 어떤 제자는 그 말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해서 토론 끝에 하늘을 넣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설사 ‘하늘’이 들어간 기도가 정확한 기억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그 단어 자체가 그리 중요한 단어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물리적 공간으로서 하늘(sky)이 아니라 초월적 공간으로서 하늘(heaven)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초월적 공간으로서 하늘은 물리적 공간으로서 하늘 뿐만이 아니라 땅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포함합니다’가 아니라 ‘포함할 수 있습니다’라고 쓴 이유는 초월적 공간과 물리적 공간의 관계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죠. 초월적 공간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지만 동시에 이 세상 모든 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존재는 서울과 뉴욕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서울에 있거나 뉴욕에 있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물리적인 존재는 너와 내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 것이죠. 이 세상에 속한 우리는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초월적 공간인 하늘에 있는 존재인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고 세상에 있는 어떤 존재와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sky)에 있고 우리는 이 낮은 땅(earth)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하늘과 땅이 그런 의미로 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주기도문에서는 하늘이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높고 우리는 낮다는 뜻의 해석은 하늘을 자꾸 물리적 공간으로 이해하려는 우리의 습성에 기인합니다. 주기도문을 해설하는 많은 책에서 하늘을 초월적 공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한 후에도, 곧 이어서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낮은 땅에 있다는 설명을 덧붙일 때가 많습니다. 이는 자꾸 하늘을 물리적 공간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높이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옆에 있는 아빠’, 혹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는 아빠’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은 넓은 간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간극을 의미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쉬운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빠, 우리 아빠, 아빠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항상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중간에 띄지 말고 한 호흡으로 기도합시다. 즉 “하늘에 계신”을 한 다음 쉬고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먼저 크게 호흡을 한 후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불러 봅시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부름으로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과 ‘우리 아버지’ 사이에 호흡을 넣어서 띄어 기도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너무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를 때 ‘여기 우리와 함께 있는 우리 아빠’를 머릿속에 그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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