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으로 응답하라

[주기도문] 1_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설왕은 2019. 3. 4. 14:55

아버지의 이름 (여호와)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인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는 정말 난해한 구절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고요. 거룩이라는 단어 자체도 어렵습니다. 일단 아버지의 이름을 제대로 알면 그 다음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도록 노력해 볼 수 있을 텐데요.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끼어들고 싶으실 겁니다.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데요. 아버지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알려주셨죠.” , 맞습니다. 출애굽기 314절에 나온 그 이름이 그나마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아는 바입니다.


좀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보죠. 출애굽기 3장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집트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때 모세가 묻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셨다하면 그들이 나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텐데 내가 그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출애굽기 314절에 나온 하나님의 자기소개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지만 새번역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아주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곧 나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그 뜻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사실 새번역이 개역개정 성경보다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입니다. “나는 곧 나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훼( יהוה )입니다. 히브리어를 표기할 때 보통 모음 없이 자음만 표기했기 때문에 이 단어를 영어로 표기할 때는 YHWH라고 표기하죠. 읽을 때는 야훼라고 읽으면 됩니다.


여기서 잠깐, 왜 야훼를 여호와로 부르게 되었는지 복잡한 설명이지만 살펴보고 넘어 가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곧 나다.”의 히브리어는 우리말로 야훼라는 발음과 비슷합니다. 야훼를 여호와가 부르게 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전통으로 인해 발음이 와전된 것입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20:7, 개정)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하나님의 이름 자체를 함부로 부르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특별히, 기원전 2, 3세기경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경전을 읽을 때 야훼라고 써져 있는 곳을 아도나이(Adonai)이라고 바꿔서 읽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은 자음만으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성문자인 YHWH를 읽을 때면 아도나이로 읽었고요. 나중에 구약에 모음을 표기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YHWH를 야훼로 발음할 수 있도록 모음을 표기한 것이 아니라 자음 YHWH에 모음 기호는 아도나이의 모음기호를 표기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차피 YHWH아도나이라고 읽으니까 모음기호도 그렇게 표기한 것이죠. 그런데, 나중에 히브리어 성서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서 YHWH와 거기에 적혀 있는 모음기호를 그대로 번역하면서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14절에 나온 하나님의 자기소개에 따르면 야훼가 더 정확한 발음이지만 여호와로 불러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야훼나 여호와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요. 우리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불러도 누구를 지칭하는지 부르는 사람도 알고 있고, 듣는 하나님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훼라는 소리 자체에 신비한 힘이나 거룩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고 있지만, 출애굽기 314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모세가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의 대답은 알 것 없다에 가까웠습니다. 새번역본에 나온 바와 같이 여호와는 나는 나다정도의 의미 밖에는 없습니다. 굳이 동사의 의미를 좀 더 살려서 번역을 한다면 어떤 것을 존재케 할 자”, 혹은 어떤 일을 일어나게 할 자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1]  하나님의 대답은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로부터 탈출시키는 자로 너와 함께 하겠다는 의미이지 자신의 이름 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름 갖기를 거부하신 것이죠.


세상에 어떤 신성한 문자나 거룩한 언어가 있어서 그 이름으로 꼭 하나님을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이름의 신성함 때문에 그 이름 발음하는 것을 삼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든 혹은 주님으로 부르든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지칭하는 특별한 단어에 대한 발음을 금지하는 것은 십계명에서 말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요구의 참뜻이 아닙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출애굽기 207절의 내용을 좀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NRSV 성경은 성경학자들로부터 가장 원문에 충실한 번역으로 인정되고 있는 번역본입니다.

 

You shall not make wrongful use of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for the LORD will not acquit anyone who misuses his name. (출애굽기 20:7, NRSV)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틀리게 사용하지 마라. 주는 자기의 이름을 오용하는 사람을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나 혹은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일을 진행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을 수행하게 되면 그 일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말 많은 악행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이 함께 쓴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Lord, Teach Us)”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대표적인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최대 모독은 ‘Gott mit Uns’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표어를 전투모에 달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 군인들의 행위다. 자유롭고 능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대의를 지지자는 수호자로 부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2]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종교는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면 우리는 항상 이런 위험에 노출됩니다. 악한 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서 악을 선으로 위장하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덧붙이면 개인적인 의견이 갑자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고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사악한 계획이 더 큰 선을 위한 하나님의 신비한 운행하심으로 탈바꿈하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름 갖기를 거부하셨을까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불안함이 있고 그 불안함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어떤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물이나 혹은 어떤 사람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소유욕은 더 강해지죠. 그 대상이 신이라는 이유로 소유욕이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을 자신의 수중에 넣고 흔들려는 야망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유되고 이용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에서 다 함께 통성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을 부르는 외침이 있습니다. “주여!” 이렇게 한 번 외치면서 함께 기도하는 교회도 있고, “주여, 주여, 주여!” 세 번 외치면서 기도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저는 한 번 주여!”라고 외치든, 아니면 주여, 주여, 주여!” 세 번 외치든 마음에 불편함이 있습니다. 여기서 는 물론 하나님을 의미하죠. 아마도, 물에 빠진 사람이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듯 하나님을 부르는 의미에서 이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 다 함께 주여를 외치며 소리 높여 기도하는 통성기도는 세계 어느 교회에서도 찾을 수 없는 한국 교회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통성기도를 하며 자란 세대이기 때문에 통성기도에 대한 거부감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주여라고 부르짖는 기도의 시작은 적응이 되지 않고 마음이 불편합니다.


주여를 외칠 때 제가 불편한 이유는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의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야훼 대신에 아도나이(주님)를 부르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대인들이 야훼 대신 주님을 부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 하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그 부름은 매우 조심스러운 부름입니다. 왜 하나님 대신에 로 부르게 되었는지 안다면 하나님을 부를 때 우렁찬 목소리로 주여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주여라고 소리칠 때 하나님을 자기 손에 붙들고 좌지우지하려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완전히 소유하려는 의도가 있는 느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접촉 지점

하나님 아버지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그냥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의 기도는 아버지를 거룩하게 하소서.”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이 기도는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거룩한 분인데 하나님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말이 안 됩니다. 이 기도는 마치 하늘을 파랗게 해 주세요.” 혹은 불을 뜨겁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와 비슷합니다.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아버지를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와 그 의미가 다릅니다. 먼저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죠. 이름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접촉지점 역할을 합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만 알아도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성품이나 인격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관련된 인간 관계들, 그 사람과 관련된 사건들을 설명하거나 재구성하거나 평가할 수 있습니다. 요새 같은 세상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만 알아도 인터넷을 통해서 정말 많은 정보들을 얻어낼 수 있죠. 누군가의 이름을 알 때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이용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을 빌릴 수도 있고요. 타인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고, 타인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그러면 그 사람을 부를 때 어떻게 부를까요? 예를 들어 이런 식이겠죠. “저기 기둥 옆에 청색 점퍼 입으시고 안경 끼신 분!” 아니면 이런 식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여기 울고 있는 아이의 어머니 계십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을 지칭하고 싶은데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르면 그 사람에 대해 묘사를 하거나 설명을 해서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묘사하거나 설명해서 불러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런 식으로 부르죠.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이 하신 일들, 하나님이 맺었던 관계들을 함께 소환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의 아빠되신 하나님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을 모르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 맺었던 관계, 하나님의 속성 등 의미를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면 우리는 기호를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게 되고 의미는 추후에 다양하게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름을 알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하나님과 우리의 접촉점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게 되는 만남의 지점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주소서.”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서 관계를 맺을 때 우리의 올바른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때 우리가 취해야 하는 자세는 무엇일까요? 바로, ‘거룩입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한 거룩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카도쉬(Kadosh)에서 나온 말로 분리됨을 의미합니다. , 세속적인 것으로부터의 분리, 더러운 것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말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된 말입니다. , 하나님은 세상과는 분리된 분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의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고 행동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거룩, 끝없는 사귐의 시작

거룩이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을 완전히 다름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윤리적인 완전성으로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도 이 점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거룩은 정의와 진리가 되었다. 이것은 창조적인 것일 뿐 결코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진정한 제사는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사상이 면면히 흘러와 결국 거룩은 윤리적 완전성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거룩은 분리된’, ‘초월된’,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운’,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의미들이 사라져 없어졌다. 그리고 거룩은 윤리적으로 선하고 논리적으로 옳은 것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거룩이라는 용어 안에 있는 진정한 의미를 포기하는 것이다.[3]

 

거룩을 윤리적 완전성이라고 이해할 때 생길 수 있는 오해는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때 윤리적으로 완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 누가 하나님 앞에서 윤리적으로 완벽해질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서 100퍼센트 윤리적으로 완벽하다고 확신하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거룩을 윤리적 완전성이라고 생각하면 생길 수 있는 또다른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윤리적 완전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옳은 것이 무엇인지 양심에 따라 알 수도 있고 또한 교육을 통해서 배운 것도 있습니다. 거룩을 윤리적 완전성으로 이해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의 윤리적 행위의 완전성에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는 우리 자신의 행위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이러한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만날 때 우리는 우리가 이제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롭고 위험하고 경이롭고 신기하고 두렵기까지 한 미지의 존재에 대한 궁극적이고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의 장소, 접촉지점은 완전히 거룩한 곳입니다.


다시 출애굽기 3장의 하나님과 모세가 서로 만나는 지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래서,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출애굽기 3:5, 새번역) 왜 신을 벗어야 했을까요? 거룩을 윤리적인 완전성으로 이해하면 신이 더럽기 때문에 벗어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신을 벗어서 모세가 깨끗한 발로 하나님께 접근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모세의 신도 더러웠겠지만 모세의 발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신을 벗어야 했던 이유는 모세가 하나님의 만나는 그 공간, 모세가 하나님과 접촉하는 그 지점은 세상의 장소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밖에서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올 때 신발을 벗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위생상의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는 집 밖의 공간과 집 안의 공간을 다른 공간으로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새롭고 놀랍고 두려운 경험입니다. 신발을 벗으면 접근할 때의 또다른 특이점은 신발을 벗고 이동하면 조심스럽게 이동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적인 분이시지만 파괴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따뜻할 수도 있지만 불처럼 뜨거울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취해야 할 마음자세에 대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난 엄마가 없다

아래 진술의 논리를 한 번 주목해 봅시다. 아마, 사춘기 시절에 한 번쯤 생각해봤을 내용입니다. 다음과 같은 논리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한 번 살펴볼까요?

 

엄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엄마가 없다.

 

엄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대전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진술입니다. 엄마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본능적으로도 그렇고 어린 아이는 엄마의 사랑 없이는 생존 자체가 힘들기 때문에 엄마는 책임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다고 가정해 보죠.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진술은 아주 자연스러운 진술이 됩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우리 엄마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나를 하나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면 우리 엄마는 우리 엄마가 아닐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죠.


이 삼단논리에서 문제가 되는 진술은 두 번째 진술입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판단을 내렸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는 너무 차이가 크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나는 아침밥을 먹기 싫은데 엄마는 아침밥을 먹으라고 합니다. 나는 공부를 하기 싫은데 엄마는 공부를 하라고 학원에 보냅니다. 나는 게임을 하고 싶은데 엄마는 게임을 그만하라고 화를 냅니다. 나는 밤 늦게까지 놀고 싶은데 엄마는 일찍 자라고 불을 꺼 버립니다. 도대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는 것이 없다면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왜 사사건건 엄마는 나의 의견을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로 나에게 원하는 걸까요? 정말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 이유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춘기 청소년이 엄마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춘기 청소년과 엄마와의 간극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극이 더 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삼단논법의 마지막 결론과 같은 진술에 다다를 수도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논리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없다.

             

두 번째 진술과 같은 판단을 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결론, 신이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신이 없다는 결론의 이유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정말 신이 없든가, 아니면 우리가 신을 잘못 이해하고 있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후자일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대로 만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는 분이시죠.


하나님은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결단코 지루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입니다. 우리가 수백 번, 수만 번 하나님에 대해서 엄청난 진리를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 번에 만나서 알게 되는 하나님은 또다른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계속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알아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과 공간은 늘 거룩한 시간과 공간입니다. 우리는 늘 기대감을 가지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만남에 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의 의미입니다.  



[1] 버나드 W. 앤더슨, 구약신학, 최종진 옮김 (서울: 한들출판사, 2001), 98-99.

[2]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trans 이종태 (서울: 복 있는 사람, 2006), 77.

[3] 폴 틸리히, 믿음의 역동성, trans 최규택 (서울시: 그루터기 하우스, 2005),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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