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아빠로 둔 어린아이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아빠’를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서 어린아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말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1]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빠로 둔 어린아이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 거듭나야 어린아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린아이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거듭날 수 있는 것인지, 그 선후관계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시민은 어린아이와 같다는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린아이 같은 삶은 어떤 삶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예수의 아빠인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고 우리도 예수와 같이 하나님을 우리의 아빠로 믿게 되었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어린아이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하고 수많은 종교적 규율과 윤리적 책무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삶은 어린아이의 특징과는 거리가 멉니다. 정해진 규칙을 숙지하여 긴장된 삶을 사는 모습은 어린아이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죠. 어린아이는 규칙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놀면서 해맑게 웃습니다. 어린아이는 삶에 대해 비관하거나 우울증에 시달리지도 않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습니다.
뭉크가 그린 니체의 초상화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할 어린아이와 같은 삶에 대해서 니체의 글을 통해 이해를 도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어린아이의 특성을 알기 쉽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니체의 글을 인용하기 전에 니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니체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알다시피 니체의 불경스러운 선언 “신은 죽었다” 때문이죠. 니체 스스로도 이 선언을 여러 의미로 사용했고, 이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니체의 설명 중에 하나를 살펴 보겠습니다. 니체의 글 “이 사람을 보라”에서 그는 ‘신’을 “삶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고안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3] 다시 말하면 니체는 신, 천국, 영혼 등의 종교적 개념이 인간의 육체와 현재의 삶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정신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신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말을 긍정적인 말로 바꾸면 인간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몸과 자신이 살아가는 삶을 소중히 아끼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니체에게 “신은 죽었다”는 말은 삶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을 뜻합니다.
니체의 선언이 불경스럽게 들리지만 사실 그 선언을 통해 니체가 주장하는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안에서 이해하는 인간의 삶과 생명에 대한 이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몸과 삶을 선물로 주셨죠. 그리고 모든 인간은 이 선물을 기쁘고 즐겁게 누릴 자격과 권리가 있습니다. 삶 이후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소홀히 여기거나 천하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가치 있는 삶, 의미 있는 삶,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신이 죽었기 때문에 도덕과 윤리의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욕구를 마음대로 채우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나중의 삶을 위해서 지금의 삶을 경홀히 여기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이제 니체가 어린아이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죠.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그의 책에서 정신의 세 가지 변신을 언급합니다.[4] 첫 번째가 낙타, 그 다음이 사자, 마지막이 어린아이입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등에 싣고 묵묵히 사막을 건너는 인내심 있는 동물입니다. 사자는 저항의 아이콘이죠. 사자는 상대에 대한 두려움 없이 으르렁대는 존재입니다. 니체는 사자가 ‘너는 해야 한다’라는 이름을 가진 용에게 대항하여 자유를 쟁취하려는 동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사자는 당위성을 주장하며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는 어떤 존재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니체는 사자가 하지 못한 일을 어린아이는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 정신의 변신 마지막 단계는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니체는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라고 말합니다.[5] 니체가 볼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낙타와 같은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즉,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적 규율과 윤리적 책무를 묵묵히 견디면서 수행해 나가는 존재였습니다. 낙타와 같은 사람들은 인내심이 대단히 강하고 삶을 묵묵히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다른 존재를 위해 무엇인지도 모를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불쌍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낙타에서 다음 단계로 진일보한 존재가 바로 사자입니다. 사자는 타자의 주장과 강요에 반항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보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반항과 저항으로 똘똘 뭉친 삶은 주체적으로 자기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아마도 니체 자신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저항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사자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니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어린아이는 권위에 저항하지만 악의에 찬 저항이 아니라 천진난만한 자기 주장으로 저항합니다. 어린아이는 즐겁게 자신의 놀이를 스스로 만들 줄 압니다. 어린아이는 삶을 긍정하며 걱정 없는 웃음을 생산해냅니다. 어린아이에게 삶이란 한바탕 웃으면서 뛰노는 자유 시간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성스러운 긍정”을 통해 “창조적 유희”를 누릴 줄 아는 어린아이를 인간의 정신이 도달해야 할 최종 단계로 본 것입니다.
“사랑의 기술”로 유명한 에리히 프롬도 어린아이의 이런 특성에 주목하고 우리도 어린아이와 같은 자발성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중 한 부분입니다.
“아이들은 또 다른 자발성의 예를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발성은 그들이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또한 그들의 얼굴에 표현되는 감정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아이이건 예술가이건, 또는 연령이나 직업으로 분류할 수 없는 사람들이건 간에 인간에게서 자발성 이상으로 매혹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은 없다.”[6]
프롬은 인류의 역사를 인간이 자유를 성장시켜 온 발자취로 보았고 최종적으로 우리는 자발성을 가진 적극적인 자유를 누리는 방향으로 역사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프롬의 견해에 따르면 미래 인류의 진보상은 이미 어린아이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죠.
주기도문은 어린아이의 삶을 살기 위한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의 아빠인 하나님을 우리의 아빠로 함께 부르며 우리의 삶을 “성스러운 긍정”의 자세로 살아가기 위한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미래에 올 자유롭고 즐겁고 행복한 나라를 지금 이 세상으로 좀더 끌어당길 수 있지 않을까요?
[1] 요한복음 3장 3절, 새번역
[2] 마태복음 18장 3절, 새번역
[3]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넘어서/우상의 황혼/이 사람을 보라, trans 강두식과 곽복록 (서울: 동서문화사, 2017), 395.
[4]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trans 장희창 (서울: 민음사, 2004), 35–39.
[5] 프리드리히 니체, 39.
[6]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trans 원창화 (서울: 홍신문화사, 2006), 216.
주기도문으로 응답하라 - 설왕은 지음/그바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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