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박완서 "친절한 복희씨"_친절은 진작 끝났어야 했는데...

설왕은 2022. 1. 25. 18:02

친절한 복희 씨라는 제목을 보고 유쾌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친절한 사람이라면 분명히 친절을 베풀 것이고 그것이 내가 직접 받는 친절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친절한 행동을 보거나 그런 얘기를 들으면 저절로 흐뭇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친절은 아무나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거나 사랑을 많이 받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친절한 자세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친절한 복희 씨는 재밌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첫 문장부터 빗나갔다.

 

그는 멍한 눈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멍한 눈의 주인공은 소설 속 복희 씨의 남편이다. 멍한 눈의 남자는 중풍에 걸려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고, 이 남자를 돌보고 있는 사람은 복희 씨이다.  처음부터 이 소설은 가벼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반드시 비가 올 것 같은 흐린 아침과 같은 시작이었다. 그래도 제목이 주는 느낌이 컸던 것 같다. 가벼운 이슬비가 내리고 별 어려움 없이 그것을 막아낼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예상은 또 빗나갔다.

 

* 줄거리 *

"친절한 복희씨"는 복희 씨의 이야기이다. 제목처럼 복희 씨는 친절하고 성격도 좋고 야무진 구석도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렇게 괜찮은 사람인 복희 씨는 사람을 잘못 만나 인생이 꼬인다. 복희 씨는 서울로 올라와서 방산상회라는 작은 가게에 취직을 했다. 주인아저씨는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아내를 잃고 자신의 엄마와 함께 아들을 키우고 있었고 군식구도 많이 거두면서 일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복희 씨는 어느 날 이 주인아저씨에게 욕을 당하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다. 아이를 지우려다가 그냥 같이 살자는 주인아저씨의 말에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로 살게 된다. 그리고 아이를 넷을 더 낳아서 잘 키우고 사는 이야기이다. 결혼을 하게 된 계기가 매우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한 것이었지만 복희 씨는 잘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분명히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보았겠지만 복희 씨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이 소설을 전하고 있다. 복희 씨는 자신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아편 덩어리를 훔쳤는데 그것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았다. 복희 씨가 그 아편 덩어리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그것을 먹으면 죽을 수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희 씨는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것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편을 의지하며 살았다. 하지만 주인아저씨에게 욕을 당했을 때 아편을 먹지 못했고 다른 어려운 순간이 있을 때에도 차마 아편을 먹고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복희 씨는 아주 귀한 신줏단지를 모시듯 그 아편 덩어리를 잘 간직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중풍에 걸린 남편이 복희 씨에게 영문도 알려주지 않은 채 약국으로 보냈다. 복희 씨는 약국에서 남편이 사 오길 바라는 약이 비아그라라는 사실을 알고 자살의 충동을 느낀다. 복희 씨는 집에 돌아가 아편을 넣어둔 상자를 들고 지하철을 타고 강변역에 내려서 한강 다리를 건너다가 아편이 들어 있는 상자를 한강에 던진다.

 

친절한 복희 씨는 분명 잘 쓴 소설이다. 문장력이 돋보이는 소설이고 군더더기 없이 복희 씨의 인생을 잘 서술했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박완서답지 않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박완서 작가는 모호한 상징이나 비유로 독자를 헷갈리게 하지 않고 담백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듯 소설을 쓴다. 그래서 박완서 작가가 쓴 소설은 소설인지 수필인지 혼동이 될 때가 많다. 그 정도로 쉽고 정확하게 자신이 뜻하는 바를 쓰는 작가가 바로 박완서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힘이 들어가 있다. 글은 좋은 것 같은데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계속 의심하면서 읽었다. 특별히 아편이 담긴 상자를 던지는 마지막 문단에 이르러서는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죽음의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내 검은 강을 향해 힘껏 던진다. 그 갑은 너무 작아서 허공에 어떤 선을 그었는지, 한강에 무슨 파문을 일으켰는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그가 죽고 내가 죽는다 해도 이 세상엔 그만한 흔적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허공에서 치마 두른 한 여자가 한 남자의 깍짓동만 한 허리를 껴안고 일단 하늘 높이 비상해 찰나의 자유를 맛보고 나서 곧장 강물로 추락하는 환(幻)을, 인생 절정의 순간이 이러리라 싶게 터질 듯한 환희로 지켜본다. 

 

 

이 문장들이 잘 이해가 되질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박완서 작가가 일부러 이렇게 흐릿하게 쓴 것 같다.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은 것이리라.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내리고 싶지는 않지만 여하튼 나는 이런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역시 시작이 중요했던 것일까? 복희 씨는 겁탈을 당해 원치 않는 임신을 했지만 그 아저씨와 결혼을 했고 40년 이상 같이 산 것 같다.  오 남매가 모두 분가해서 아이가 있는 것을 보면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으리라. 그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랑'이라는 것이 생길 만도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복희 씨는 남편을 증오한다. 남편과 같이 살고 아이를 키운 것은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참는 것이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었고 삶의 순간순간에 남편에게 겁탈당했던 그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거기서 한 걸음도 벗어나질 못한다. 그래서 친절한 복희 씨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대략 무난한 삶을 살지만 일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복희 씨가 방산상회에서 군식구로 있었던 한 대학생의 친절을 통해 묘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목석같던 내 몸이 진저리를 치면서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나라고 그때까지 왜 사랑을 꿈꿔보지 않았겠는가. 내가 꿈꾼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거였다. 그러나 이건 몸의 문제였다. 나는 내 몸이 한 그루의 박태기나무가 된 것 같았다. 봄날 느닷없이 딱딱한 가장귀에서 꽃자루도 없이 직접 진홍색 요요한 꽃을 뿜어내는 박태기나무, 헐벗은 우리 시골 마음에 있던 단 한 그루의 꽃나무였다. 내 얼굴은 이미 박태기꽃 빛깔이 되어 있을 거였다. 나는 내 몸에 그런 황홀한 감각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이성 간의 신체 접촉을 통한 사랑의 감정이 움트는 것을 이토록 생생하게 표현하다니... 작가의 표현력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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