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

[한국단편소설] 공지영 "고독"_고독할 수 없어서 고독한 사람

설왕은 2023. 1. 29. 07:21

공지영 작가가 1999년에 쓴 "고독"은 평범한 한 여자의 일상과 생각을 적고 있다. 결혼하고 두 명의 어린 자녀를 둔 한 엄마의 이야기이다. 자녀들은 아직 어리고 남편은 직장인이고 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못해서 아껴서 살아가는 보통 가정 주부의 이야기이다. 좀 특별하다면 이 여자는 아빠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고 만난 적도 없다. 이 여자의 엄마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고 그 남자가 말도 없이 사진도 한 장 남기도 떠나지 않아서 엄마와 단 둘이 살다가 엄마가 재혼을 해서 여동생이 하나 생겼다. 의붓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으나 그 역시도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서 소설 속 주인공 그녀의 말로는 성이 다른 세 사람이 살게 되었다는 것이 평범하지 못한 어려운 상황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녀도 그녀의 동생도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이야기인데 어째서 고독일까?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거실 탁자 위에 낯선 책이 놓여 있는 걸 발견한 것은 막 집 안 청소를 시작하려던 때였다. "어두운 상점의 거리". 뒤표지를 살펴보니 콩쿠르상에 빛나는 모디아노 최대의 걸작! 바스러지는 과거, 지워버린 생의 흔적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기억의 어두운 거리를 헤매는 고독한 영혼의 발걸음!이라는 글씨에 커피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제야 그 여자는 그것이 어제 집에 들렀던 동생이 두고 간 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얻은 것이 하나 있다면 모디아노의 작품을 소개받았다는 것이다.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의 거리"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은 소설의 처음과 맨 끝부분에서 나온다. 고독이라는 주제로 쓴 것 같다. 나도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겉표지에 나온 설명으로 보면 그런 것 같다. 소설 속 주인공 그 여자는 동생이 남기고 간 이 책을 읽지 않는다. 첫 문장 정도 읽는다. 이미 그 첫 문장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어서 그런지 그다음까지 가지도 않는다. 소설에서 소개하고 있는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계속 그녀, 그 여자라고 나온다. 나왔는데 내가 발견을 못 했을 수도 있는데 여하튼 소설 속에서 계속 그녀, 그 여자로 나온다. 아마도 일부러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 같다. 이 여자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자기 자신'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국문학과를 나왔지만 글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책도 읽지 않는 여자다. 그리고 그 외에 자신이 해야 하는 역할은 충실히 한다. 아내의 역할, 가정 주부의 역할, 엄마의 역할, 언니의 역할은 충실하게 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나 자기 자신의 꿈과 같은 것은 없다. 그저 타인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일들을 열심히 할 뿐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모디아노 소설의 첫 문장이 마음에 와닿았던 것 같다. 어느 카페테라스에 있다면 그 실루엣은 어두운 실루엣일 수 없다. 빛을 잘 받고 있을 테니까. 환한 실루엣, 잘 보이는 유령 같은 존재로 살고 있는 모디아노 소설 속 주인공은 그 여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던 것 같다. 

 

이 소설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큰 따옴표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대화가 그냥 계속 문단 안에 들어가 있다. 읽다 보면 어느 게 대화이고 어느 게 일반 서술문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것도 아마 일부러 그랬을 것 같기도 왜 그랬는지 짐작하지 않겠다. 읽기에 살짝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글이 술술 잘 읽혔으니까. 

 

약 기운 탓일까, 여린 스탠드 불빛에도 눈이 부셨다. 그래서 그 여자는 모디아노 최대의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기억의 어두운 거리를 헤매는 고독한 영혼의 발걸음을 더는 따라갈 수 없었다. 아마 동생의 전화가 곧 걸려올 텐데. 그 여자는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그 애를 위로해주어야 할 텐데, 난 그 애에게 남은 유일한 피붙이인데. 그 여자는 피곤한 눈을 감았다. 그도 아니면 택시를 타고 온 남편이 택시비를 가지고 아파트 입구로 내려오라는 그런 전화를 할 수도 있었다. 술에 취한 남편은 곧잘 그러곤 했으니까. 집 앞에 와서 전화를 했는데, 택시비도 없이 택시를 타고 와서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으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그러니 잠들지 말아야지, 아주 잠들지는 말아야지. 그러면서 그녀는 곧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렇게 소설은 끝난다. 이 여자가 고독했던 이유는 아마도 고독할 시간이 없어서 고독했던 것 같다. 혼자서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볼 겨를이 없다. 동생의 전화를 기다려야 하고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이 여자가 깨어 있는 이유이다. 이 역할만 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다른 것을 할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무엇을 했을까? 끊임없는 아이들 뒤치다꺼리였다. 그것 역시 엄마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 속에서 이 여자만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좋은 엄마, 좋은 언니, 좋은 아내로서 살고 있다. 남편은 급여가 30%나 깎였는데도 사람들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고, 동생은 남편과 이혼하겠다고 하고, 아이들은 서로 싸우고 자기 숙제에 버거워서 힘들어한다. 그 모든 것을 옆에서 도와주고 격려해 주고 그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람이 바로 이 여자이다. 이 여자는 고독할 틈이 없다. 그래서 이 여자는 고독한 것 같다. 이 여자는 스스로를 환하게 잘 보이는 유령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평범한 일상을 그린 소설이 재미있었다. 평범한 속에서 큰일들이 일어나는데, 예를 들어 동생이 남편과 바람난 여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아침 드라마에서 그렸다면 긴장감을 유발하는 음악과 함께 동생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면서 감정 변화를 보여 주었을 텐데, 소설에서는 그냥 담담하게 적어 내려간다. 동생은 마치 남의 인생처럼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려고 한다. 그런 동생 때문에도 고독하다고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삶의 일부분이니까 꼭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그 여자는 고독하다고 느꼈고 자신이 환한 실루엣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고독할 수 없어서 고독한 여자. 남자라면 어떨까? 모디아노의 소설 속 주인공은 남자인 것 같은데 한 번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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