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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설왕은 2019. 2. 8. 11:38

 

제가 요새 고민하고 있는 주제는 '어떻게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입니다. 어떻게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어떤 누구도 타인에게 그 사람의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없습니다. 아니네요. 생각해 보니 부여해 줄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은 사람은 자신이 부여받은 존재의 의미대로 사는 것이 진짜 자신의 모습일까요? 타인에 의해 강요된 존재의 의미대로 사는 사람은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설왕은TV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너는 아니잖아

 

“소유냐 존재냐”(1976)에서 에리히 프롬(1900-1980)은 우리가 어떻게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소유하려는 삶을 버리고 존재하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소유를 줄이거나 혹은 무소유를 지향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설명 안 해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욕구를 줄이라는 말이 좀 더 정확하겠네요. 프롬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자기소개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까요? 자기소개를 할 때 어떻게 하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늘어놓습니다. 일단 이름부터 소개하겠죠. 그다음은 학위나 자격증, 출신 배경, 직업,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집이나 차 등을 소개할 것입니다. 아마 거의 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기소개를 할 것입니다. 프롬의 지적이 날카롭습니다. 프롬의 질문은 이런 것이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당신 자신입니까?” “당신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이 당신 자신입니까” “당신이 살고 있는 집이 당신 자신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요? 이런 측면에서 프롬은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욕구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소유한 자의 존재 의미를 밝혀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소유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안하니까요. 실존주의 철학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은 죽음을 향해 던져진 존재입니다. 존재는 비존재를 향해서 날마다 나아갑니다. 지금은 분명히 어떤 존재인데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될 테니까요. 사람들은 이 불안함은 어떤 것을 소유함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이 불안함은 극복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모든 인간 존재는 비존재가 됩니다.

 

 

프롬이 이 책을 시작하기 전에 세 개의 인용구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 세 개의 인용구가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떠받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도는 존재이다.

- 노자

 

사람이 해야 것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당신의 존재가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당신이 당신의 생명을 표현하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당신은 더욱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생명은 그만큼 더욱 소외된다.

- 마르크스

 

소유양식은 비교적 쉬우니까 존재양식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죠. “소유냐 존재냐에서는 제5장 존재양식이란 무엇인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존재하는 사람의 특징은 능동적이라는 것입니다. 프롬의 말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성장하는 , 흘러넘치는 , 사랑하는 , 에고의 감옥을 빠져나가는 , 관심을 갖는 , 참가하는 , 주는 것을 의미한다.”( 112, 정성환 역 ) 이렇게도 말하죠. “우리가 비존재의 소유양식을 감소시키는 정도만큼 존재양식은 나타난다.” (113) 프롬은 막스 훈치거로부터 들은 예를 사용하는데요. 파란색의 유리병이 파란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색깔을 가진 여러 파장의 빛 중 파란색 파장의 빛을 보유하지 않고 내보내기 때문입니다. 아주 인상적인 설명입니다. 소유를 줄이는 만큼 우리는 존재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가짐으로써 자신을 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줌으로써 자기 자신의 색깔을 있다는 말이지요

 

프롬은 인간 본성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하고, 우리의 능력을 표현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이기주의의 감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뿌리 깊은 고유의 욕망을 갖고 있다.” (127) 저도 프롬의 말에 동의합니다. 인간은 무엇을 가지려고 하는 욕망도 있지만 반대로 무엇을 주려고 하는 욕망도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 법이나 국가가 없어진다면 혹은 최후 심판을 말하는 종교적 가르침이 없어진다면 인간 사회는 완전한 파국에 이를까요? 아닐 것입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닥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프롬에 의하면 소유는 갖는 것이고요, 존재는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그렇습니다. 소유와 존재의 근원적인 욕망은 같습니다. 자기 고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133) 소유는 내가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가짐으로써 자기 고립을 극복하는 것이고요. 존재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 혹은 나의 능력, 나의 , 나의 등을 타인이나 외부 세계에 줌으로써 자기 고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프롬의 지적 하나만 언급하고 마치죠. 프롬은 죄와 회개를 강조하는 경향은 소유양식이라고 말합니다

 

권위주의적 체계인 소유양식에서는 죄는 불복종이며 참회, 징벌새로운 굴종에 의해 극복된다. 존재양식, 비권위주의적인 체계에서 죄는 해소되지 않는 소원함이며, 이것은 이성과 사랑의 충분한 개화로 하나가 됨으로써 극복된다.” (156)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인간이 신과의 일체화를 통해 자기 고립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있는데요. 이러한 고립은 더 철저한 굴종에 의해서 해결이 되든가 아니면 사랑의 관계로 해결이 되든가 중에 하나입니다. 전자는 소유의 방법, 후자는 존재의 방법입니다. 전자는 소유되기를 희망하는 것인데요. 물론, 방법도 자기 고립을 피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내가 자신으로 존재하는 과는 거리가 멀죠.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을 있습니다. 신은 소유양식으로 존재할까요, 존재양식으로 존재할까요? 소유양식으로 존재한다면 인간이 신에게 소유되는 것이 맞고요. 존재양식으로 존재한다면 후자가 맞겠죠? 왜냐하면 존재양식으로 사는 존재는 물건이나 사람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힌트를 하나 드립니다. 신은 이름 갖는 것조차 거부했습니다.

 

 

소유냐 존재냐 프롬이 죽기 4 전에 발간된 그의 인생 역작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인류의 행복을 위한 그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현대인들이 이 책을 읽고 삶의 방식을 바꾼다면 좀 더 나은 세상이 오는 시기를 당길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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