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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설왕은 2019. 2. 22. 19:57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문필가입니다. 러셀을 단순히 철학자로 부를 수 없는 이유는 여러 방면으로 활발하게 사회 참여를 했기 때문입니다. 러셀은 그의 생각을 철학적인 글이나 강의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 전반과 정치적인 영역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평화 운동과 반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나이가 들수록 정치적인 목소리를 점점 높여갔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행동하는 철학자였습니다. 

 


러셀이 사람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은 까닭은 그의 철학이 생활 밀착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여유로운 사람들의 지적 유희가 되기 쉬운데 러셀의 철학은 그렇지 않았죠. 그러한 러셀 철학의 단면을 보여 주는 책이 바로 이 책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 1935)입니다. 러셀이 이 글을 쓴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제목이 다소 충격적으로 들립니다. 저는 이 제목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게으름은 나쁜 것인데 어떻게 게으름을 찬양할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정말 게으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아마 무시했을 텐데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책을 읽고 사색하고 글을 쓰고 여러 가지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노벨상 수상 철학자 러셀이 한 말이니까 그의 말을 유심히 한 번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은 15개의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이 있는 책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맘에 드는 한 부분만 읽어도 되고 시간이 날 때 하나씩 읽어도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 첫 번째 글이고, 두 번째 글이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인데 이 글이 유일하게 첫 번째 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글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을 찬찬히 다 읽을 여유가 없는 분이더라도 두 번째 글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까지는 읽어야 러셀의 주장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재밌는 제목의 글들도 있습니다. “인간 대 곤충의 싸움”, “혜성의 비밀”, “영혼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글들은 제목 자체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글입니다. “혜성의 비밀”이 이 책에서 가장 짧은 글인데 러셀 생각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러셀이 이 글을 쓴 목적은 근면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제목이 좀 도발적인데요. 사실 러셀의 주장은 노동 시간을 줄이자는 말입니다. 하루에 열두 시간을 일해도 먹고살 만큼의 생산성을 낼 수 없다면 러셀의 주장은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러셀은 근대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서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좋아진 점을 지적합니다. 전에 8시간을 일해서 생산하던 양을 이제는 4시간만 일해도 같은 양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러면 이때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모두가 4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유를 즐길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는 8시간 일하고 경쟁에서 밀려난 노동자는 직장을 잃을 것인가? 러셀은 전자로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두가 노동 시간을 줄이고 삶의 여유를 즐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가 시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러셀은 말합니다.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 우매한 금욕주의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과도한 노동을 주장케 할 뿐이다.” (24)  

그러나, 러셀의 주장과는 다르게 실제 사회는 후자로 가고 있습니다. 노동 시간은 줄어들지 않고 생산량은 필요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잉여 생산물은 부자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러셀은 한탄합니다.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33)  

왜 이러는 걸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러셀은 그 이유가 “근로가 미덕”이라고 윤리적 믿음 혹은 “노동의 존엄성”을 내세워 노동자를 이용하려는 부자들의 속임수라고 주장합니다. 부자들은 열심히 안 살고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죠. 그러면서도 고용주는 고용인에게 열심히 일하라고 압박을 합니다. 러셀은 근로가 미덕도 아니고 노동의 존엄성도 근거가 없다고 말합니다. 

근로에 반대하여 러셀은 게으름을 찬양합니다. 러셀은 노동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친 노동, 여가 없는 노동을 반대하는 것이죠. 러셀은 인간에게는 게으름, 달리 말하면 빈둥거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러셀의 말입니다. 

“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과학적 호기심에서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호기심을 맘껏 탐닉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든 배곯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젊은 작가들은 기념비적인 대작을 내는데 필요한 경제력을 확보할 요량으로 감각적인 작품을 써서 주의를 끌어보려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31-32) 

노동 시간 단축이라는 러셀의 바람은 이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러셀도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일이 적어지면 남자들은 술이나 마시고 아이들은 게임을 더 많이 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하죠. 그런 부작용도 없지 않겠지만 러셀은 노동 시간 단축으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행복과 환희와 문명의 발전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저는 러셀의 말에 동의합니다. 러셀의 두 번째 글인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을 읽으면 러셀이 말하는 게으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이윤을 가지고 오는 유용한 지식만을 습득하려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오히려 경제적 이득이나 사회적 성공과는 상관없는 무용한 지식이라고 러셀은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알쓸신잡 같은 지식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는 것이죠. 러셀에게 게으름이란 특별한 목적 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질문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노동 시간이 지나치게 많으면 러셀이 말하는 이런 게으름의 시간은 절대로 확보할 수 없죠. 

러셀의 바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점점 더 치닫고 있습니다. 사회 분위기도 문제이고 기득권 계층의 속임수도 문제이겠지만 우리들의 생각 자체가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까요? 당장에 빈둥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많은 이들이 죄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빈둥거리고 놀고 있는 자녀들을 보면 부모들은 참기 어려워합니다. 저렇게 게을러서 커서 뭐가 될지 저절로 걱정이 되죠. 그러나, 열심히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강박관념에 대항하여 러셀은 근본적인 질문을 합니다. 사람은 왜 열심히 일해야 합니까? 왜 노오력을 해야 합니까?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 얼마전에 공식적으로 근로자 대신에 노동자라는 말을 쓰기로 했는데요. 100년 전 러셀의 주장이 이제야 조금씩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갈 길이 멉니다. 모두들 열심히 일하는 세상이 아닌 모두들 즐겁게 생각하고 잘 노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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