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의 노트

[신학노트] 구원이란 무엇인가

설왕은 2019. 3. 11. 11:49

구원의 의미

 

구원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교회에서 구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많이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는 우스개 소리로 그런 말을 합니다. "아니 주려면 십원을 주지 왜 구원을 줍니까?" 이 말은 우스갯소리지만 생각해 볼 만한 말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은 그냥 하나의 기호로 이름밖에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우리는 구원의 의미를 헤아려 보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교회에서는 금기시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습니다."라고 말씀을 전하면 청중은 "아멘"하고 화답할 뿐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수 없죠. 구원에 대해서 더이상의 질문이나 더 이상의 설명이 없습니다. 그냥 건드리면 안 되는 것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기독교에서 구원은 예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다양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원을 말할 때 어떤 의미로 말하는지 스스로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우리나라 교회에서 구원을 말할 때의 의미는 대체로 한정되어 있기는 합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구원은 대체로 미래적인 의미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다음과 같이 교리를 구분하기도 합니다. 

 

1. 칭의: 과거에 일어난 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과거의 사건

2. 성화: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본받으며 날마다 거룩해지는 사건

3. 구원: 미래에 일어날 일,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거하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건

 

우리나라 기독교에서 구원의 의미는 대체로 위와 같은 의미입니다. 교회에서 '구원의 확신'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그 말을 좀 더 풀어서 하면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려줍니다. 즉,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죠. 그러나, 칭의, 성화, 구원 모두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어느 한 지점에 국한해서 설명하기에는 세 단어 모두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는 구원은 대체로 미래에 일어날 사건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죠. "당신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으로 통용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구원은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빌립보서 2장 12절, 새번역)

 

 

 

구원에 대한 교회의 이해

 

구원에 대한 교회의 이해는 거의 하나로 모아집니다. 사실 구원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이 한 가지 외에는 거의 다루지를 않습니다. CCC라는 단체에서 사용하는 4 영리를 보면 이 한 가지 견해가 잘 정리되어 있죠.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 하나님과 인간은 좋은 관계였다. 

2.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 관계가 단절되었다.

3. 예수가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었다.

4.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고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 

 

1번은 창조론, 2번은 죄론, 3번은 그리스도론, 4번은 구원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각각에 대해서 수많은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보통 교회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

 

전도를 하다 보면 이 문제에 꼭 부딪칩니다. 전도를 할 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지 못했습니까?" 

이 말의 의미는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사람이 예수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금 지옥에 있다는 말입니까?'의 뜻입니다.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요?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질문자는 반감을 가게 되겠죠.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도록 혁혁한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을 지옥에 놔두는 하나님은 과연 누구인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순신 장군은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고 전도자는 전도의 이유가 없어지겠죠. 예수를 알지 못해도 구원을 받는다면 전도자가 예수를 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순신 장군이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의 문제는 신학적으로 의견이 갈리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어떤 답변을 하느냐의 따라서 자신의 신학적 관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구원의 관련성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구원의 필수 구성 요소라는 관점입니다. 즉, 예수의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의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관점이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신학적으로는 계몽주의 시대 이전에 유행했던 관점입니다. 다른 하나의 관점은 십자가 사건은 하나의 상징으로 구원의 확증적 사건이라는 관점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무시간적인 하나님의 의지로 십자가는 구원 의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계몽주의 이후의 신학자들은 대체로 후자의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전자의 관점을 취하면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고, 후자의 관점을 취하면 이순신 장군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떤 관점이 옳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어떤 관점이 옳으니까 다른 관점은 이단이라고 내치는 것도 올바른 자세라고 볼 수 없죠. 그러나,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구원의 필수 구성 요소로 그것 없이는 구원도 없다고 보는 관점이 우세합니다. 이 관점이 우세한 것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후자의 관점을 이단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온 모세나 다윗은 어떨까요? 예수를 알고 믿고 구주로 고백하지 않았는데요. 구원을 받았을까요, 못 받았을까요? 위에 나온 전자의 관점에서는 구원받지 못했을 테고, 후자의 관점에서는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자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모세나 다윗 등 구약에 나온 신앙인들은 모두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모세나 다윗 등의 인물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교회에서 구약성경을 논하는 것 자체를 꺼려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알거나 믿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와 구원의 관련성에 대해서 신학적으로도 의견이 분분하고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미래의 구원이 아닌 현재의 구원으로

구원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지는 복합적 의미 때문에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이 가지는 미래의 의미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의미는 불분명하고, 죽고 나서 천국에 간다는 것은 증명하기도 불가능하고 확신한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구원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구원을 말할 때는 미래의 불확실한 어떤 것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현재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현재 자신의 삶의 모습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확실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면 나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말하는 것은 구체적인 구원의 사례와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삶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윤리적 완성을 향한 삶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구원은 그리스어 구원(Σωτηρία)이 의미하는 바와 같습니다. "어려움이나 위험 빠진 사람 돕거나 구하여 줌"의 의미입니다. 한자로도 구원은 救援으로 건져낼 구, 당길 원으로 씁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면 정확히 맞을 것 같습니다.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건져내는 의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구원받은 삶의 표준 모델이 됩니다. 구원이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늘 읽으며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는 삶을 살아가는 다른 하나의 모습은 '그리스도와 끊임없는 사귐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구원의 현재적 의미는 이 관점에 더 가깝습니다. 루터와 칼빈의 관점도 이와 비슷하고요. 즉, 윤리적으로 고귀한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 더 우선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사귐이고 최종적인 목표는 그리스도와의 합일입니다. 윤리적 삶을 추구할 때의 문제점은 윤리적 삶의 기준은 자기 자신의 고정관념에 기반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성이 참정권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100년 전에 시작된 일입니다. 100년 전만 해도 여성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당연시되었죠. 노예제도가 있을 때 기독교인 주인은 노예에게 더 관대했을까요? 아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사실은 사회통념에 따른 가치 추구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가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고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 가게 되죠. 우리의 잘못된 윤리의식이 깨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구원을 보지 못하면 미래의 구원도 믿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지금 아무리 엉망으로 살아도 미래에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미래에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예수가 현재를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현재를 구원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미래에 구원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현재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미래에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적어도 구원의 복합적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구원을 미래에 일어날 사건으로만 한정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구원의 증거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 밖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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