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책리뷰] 다미앵 클레르제-베르노 "무력할 땐 아리스토텔레스"

설왕은 2019. 7. 23. 10:59

"이렇게 우리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도 있다. 건강, 명성, 풍요로운 생활의 안락함...... 우리가 이런 포기 속에서 계속 행복하다는 느낌을 갖는 한에서는 본질적인 것은 무사하다. 사막의 고행자가 모든 것을 신의 이름으로 포기했다면 그는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행복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게 충분하며 우리 삶을 완전히 정당화한다. 이렇게 해서 행복하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 (48-49p)

 

 

이 책의 제목이 재밌다. 무력할 땐 아리스토텔레스라... 금욕을 주장했던 스토아주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 추구 욕구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학자들의 책을 읽다보면 결국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애매하게 말할 때가 많다. 좋게 말하면 너무 함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나는 가끔 책을 읽다가 듣지도 못할 저자에게 이렇게 혼자 중얼거린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니?"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쓴 글은 아니고 해설서라서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그래도 위의 인용구를 보면 말이 좀 이상한 부분이 있다. 

 

나는 인간을 단순하게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성격유형으로 사람을 분류한다거나 모든 인간의 공통된 근본적 욕망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 다 다르다. 그래서 각자의 이야기를 다 들어봐야 한다. 대체로 "사막의 고행자"는 행복하기 위해서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인에게 종교적 금욕이란 두려움, 걱정, 근심에 기반할 때가 많다. 혹은 신의 능력을 얻고자 하는 야망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사막의 고행자에게 가서 물어봐야 한다. "왜 고행을 하십니까?" 아마 행복하기 위해서 고행을 한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행자가 개인적으로 행복을 느끼지 않는데도 "사실 너는 행복하기 위해서 고행을 하고 있는 거야. 네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행복추구란 웃기는 말이다. 

 

근데 왠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했을 것 같다. 자기가 행복을 추구했고 행복했으니까 타인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배움에서 얻는 즐거움과 감각에 따른 즐거움 중 후각을 통한 즐거움, 그리고 많은 소리와 볼거리, 기억과 희망, 이것들은 모두 고통 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무엇의 생성이란 말인가? 어떤 것이 도대체 결핍된 적이 있어야 그것의 충족도 일어날 것이 아닌가?" 

 

(윤리학 X, 1173b 16-20 에서 재인용)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가 행복의 이상을 가져오는 곳은 보는 즐거움이나 듣는 즐거움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모두에게 가장 익숙하고 가장 공통적이고 가장 잘 엄습해오는 촉각의 즐거움에서다." (68p)

 

인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이다. 쾌락이나 행복이 결핍의 충족, 혹은 고통으로부터 해방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은 경험적인 진리이다.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 졸릴 때 잠을 자는 것, 피곤할 때 쉬는 것 등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감각적 행복 중 제일 강렬한 것이 될 수 있다. 쾌락을 극도로 느끼기 위해서는 고통의 양을 극도로 늘리면 된다. 식사의 즐거움을 극대화하려면 배고픔의 고통을 극대화하면 된다. 

 

소문난 식당에 가서 번호표를 받고 한 시간 이상 기다리고 있다가 내 이름이 불려졌을 때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르게 되었던 경험이 떠오른다. 나 스스로도 웃겨서 '와 이게 뭐라고 이렇게 좋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리스토 선생님은 오래 전에 이렇게 정리해 놓으셨구나. 

 

정리하면, 행복은 결핍의 해결로 인해 더 강렬해지며 따라서 고통 없이 극도의 행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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