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설교

[성화설교] 상처와 별_시편 147:1-11

설왕은 2021. 2. 7. 11:40

제목: 상처와 별 

 

『[1]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2]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3]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4]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5]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7]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8]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9]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10]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1]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 147:1-11, 개정)

 

인사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분에게 하나님 주시는 지혜와 용기와 사랑이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 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주중에는 아침에 정신없이 바쁩니다. 억지로 일찍 깨야 하죠. 직장 다니시는 분은 직장에 가야 하니까 일찍 일어나야 하고, 가정 주부는 애들 학교 보내야 하니까 집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아침은 전쟁이죠. 그래서 토요일 일요일에는 느긋한 아침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다들 있으실 것입니다. 주일 예배가 11시이니까 아주 이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교회 오시려면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더라도 미리 일어나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죠. 마음먹고 긴장해야 시간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오신 분들, 그리고 온라인으로 함께 하시는 분들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주 잘 오셨습니다.

 

본문의 내용

시편 147편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시편 147편은 찬양시입니다. 시편에 찬양시가 많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많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시편을 한 번 떠올려 보시면서 시편은 주로 어떤 느낌인지 생각해 보시면요. 기쁨을 표현한 시보다 아픔을 표현한 시가 더 많습니다. 시편에 제일 많은 시가 탄식시입니다. 탄식시는 개인 탄식시와 공동체 탄식시로 나눌 수 있고요. 찬양시는 20편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찬양시는 귀한 시편입니다.

 

시편 147편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6, 7-11, 12-20절까지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고 아니면 1-11, 12-20절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1, 7절에 보시면 시편 147편이 찬양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7]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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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를 외치고 노래도 부르고 악기도 연주하면서 찬양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시편 147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외치고 있는데 찬양에도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고 끝낼 수는 없습니다. 무엇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고 내용을 언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이 시편이 언제 지어졌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2절에 보시면 이 시편이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2]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기원전 6세기에 남유대가 멸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갑니다. 포로로 약 70년 정도를 바벨론에서 머물다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시편 147편은 이 시기에 지은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상처를 입은 자들을 싸매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나라도 100년 전에 일제 강점기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를 경험하신 분들 중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지만 그때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아직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통해 일제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해 들으면 정말 끔찍합니다. 단순히 역사책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의 증언을 들으면 우리는 같은 민족으로서 그 당시의 고난과 아픔을 아릿하게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에 끔찍한 상처를 입은 사람도 괴롭겠지만 그 상처를 들여다보는 사람조차도 어질어질하기도 합니다.

 

유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에 남아 있는 것도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으니 상상하기 힘든 아픔과 설움과 시련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지 지금 7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그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시기가 끝났다고 아픔 끝, 기쁨 시작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민족의 독립이야 창과 칼로도 가능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받은 상처는 치료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때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백성의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시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고 찬양합니다.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의 이름을 다 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자들을 붙드시고 악인들을 쓰러뜨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사람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다음 구절은 하나님의 섭리와 돌봄에 대한 찬양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구름이 있습니다. 구름이 미관상으로도 아름답지만 아름다움만 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기능이 있습니다. 구름은 비를 내리게 하고요. 땅에 비가 와야 풀이 자라고 나무가 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들짐승이 풀과 열매를 먹고 까마귀 새끼도 먹이를 얻을 수 있습니다.

 

Image by ATDSPHOTO from Pixabay  

 

저는 10절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말과 사람의 다리가 나옵니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센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다리 근육이 울끈불끈하다고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힘센 말이나 울끈불끈한 사람의 다리를 굳이 싫어하시거나 징그러워하시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힘센 말이나 사람의 다리를 보고 우와, 하고 감탄하고 좋아하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닥 그런 것에 큰 감흥이 없으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무엇을 좋아하실까요,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바로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힘센 말이나 사람의 억센 다리를 기뻐하지만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신다고 나와 있습니다.

 

1절부터 11절까지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하나님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별들을 세시고 그 이름대로 부르시는 우주의 통치자이시고 동시에 지구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돌리시는 분이시죠. 구름을 만들어서 비를 내리시고 식물과 동물을 먹이시는 이 엄청난 일들을 관장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능력이 많으신 분의 관심은 힘센 사람이나 동물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상처 입은 자, 겸손한 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상처를 싸매시는 하나님

이런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저는 3절과 4절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상처와 별입니다. 3절과 4절 사이의 관계만 잘 살펴봐도 시편 147편의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을 잘 생각해보시면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임에 분명합니다.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분으로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지혜와 측량할 수 없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여러분, 요새 영화나 드라마에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올 때 주로 나오는 능력 중 하나가 치유 능력입니다. 칼에 베여서 피가 철철 나다가도 순식간에 피가 멈추고 상처가 아물죠.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의 소유자도 나옵니다.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중 경이로운 소문이라는 드라마에서도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상처에 손을 얹고 집중하면서 힘을 주면 부러졌던 뼈도 다시 붙고 상처도 아물고 금방 치유되는 거죠.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치유 능력은 이런 것입니다. Awesome! 그런데 여기 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치료해 주신다고 나와 있습니까? 상처를 싸매신다고 나와 있습니다. 기적과 같은 능력으로 상처를 싹 치료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싸매 주신다고 나와 있습니다. 뭔가 좀 초라합니다. 모양이 좀 빠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최고의 명의, 우주 최고의 초능력자이실 텐데, 과연 이것이 최선인지 의문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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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상처를 싸매신다는 말은요. 돌봄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치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들여서 상처 입은 사람은 돌봐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처를 싸매면 치료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 다음날 혹은 며칠 있다가 싸맸던 것을 풀고 상처를 확인하고 또 약을 바르고 다시 또 싸맵니다. 그러면서 치료해 주는 분이 물어보죠. 상처 때문에 아프지는 않았는지 불편한 데는 없는지 답답하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런 상처가 다시 나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 어떻게 주의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얘기해 줄 수 있습니다.

 

상처는 쉽게 아무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상처는 아주 심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원상으로 회복되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제대로 치유받지 않으면 계속 아픕니다. 마음의 상처는 주로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을 때가 많습니다. 부부간에,혹은 부모 자식 간에, 혹은 친한 친구 간에, 혹은 같이 일하는 직장 동료 간에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결혼해서 같이 살다 보면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싸우고 화해하고 그러죠. 그게 부부생활입니다.

 

저도 아내와 많이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감정이 격할 때는 서로 싸우다가도 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으면 사과를 합니다. 보통 아내가 사과를 받아줍니다. 그런데 몇 달 있다가 또 다투게 되면 그때 제가 잘못하고 사과한 일이 다시 또 거론됩니다. 분명히 제가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아내도 사과를 받아주었는데 마치 방금 제가 저지른 잘못처럼 다시 또 튀어나옵니다. 그럼 사실 화가 나죠. 분명히 제가 사과하고 아내도 사과를 받아주고 끝난 얘기였는데요. 그런데 이렇게 그 일이 다시 튀어나온다는 것은 상처받은 사람의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다시 또 사과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큰 상처를 입혔다면 그 상처가 제대로 아물 때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사과를 하는 게 맞습니다.

 

상처를 싸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제대로 낫지 않았다면 다시 또 싸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을 때까지 반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상처를 싸매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그때 그일 때문에 아팠다고 하소연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실까요? 그때 내가 위로해줬잖아, 그때 내가 치료해줬잖아. 그래서 깨끗하게 나았잖아, 이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 아팠구나, 하시면서 다시 새로운 붕대로 상처를 싸매 주시는 분입니다. 단순히 치료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돌봐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상처를 대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눈을 맞추고 위로의 말씀과 함께 상처를 싸매 주시는 분입니다.

 

별을 세시는 하나님

3절과 4절 사이의 간극이 큽니다. 상처를 싸매 주시는 하나님을 말하다가 갑자기 별을 세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상처에 머물러 있었는데 갑자기 눈을 들어서 별을 세시기 시작하시고 그 별의 이름대로 별을 하나씩 부르시는 하나님이 나옵니다.

 

별을 세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이유는 제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 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이 6000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지금은 밤이 되어도 별이 잘 안 보이지만 옛날에는 밤만 되면 아마 별이 하늘에서 쏟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별을 세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별 헤는 밤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Image by FelixMittermeier from Pixabay  

 

그렇죠. 6000개나 되는 별을 언제 다 세고 있습니까. 세다 보면 벌써 아침이 오고 아침이 오면 별은 사라집니다. 그다음 날 밤에 이어서 셀 수 없습니다. 또다시 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별을 세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별이 너무 많아서 세다 보면 분명히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이 별을 내가 세었나 안 세었나 헷갈려서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별들을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신다고 시인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도 헷갈리지 않으시고 구별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요. 지금은 과학자들이 별을 다 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다 붙여 놓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별까지 망원경을 사용해서 더 많이 찾아내고 또 그것들에도 이름을 붙여 주기도 합니다. 별을 세고 이름을 지어주려고 마음먹으면 인간도 할 수 있죠. 윤동주 시인도 자신의 시에서 이거 다 셀 수 있을 것 같은데하고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시편 147편은 말씀드렸다시피 찬양시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하늘의 별을 세고 그 별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그리 대단한 능력이 아닙니다. 지금은 과학자들이 할 수 있고 사실 옛날에도 많은 사람이 했습니다. 별을 세고 별에 이름을 붙여 주고 별자리를 만들고 거기에 이야기까지 지어 주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찬양하려면 다른 것을 언급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4절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3절과 4(상처와 별) 연결하기

3절과 4절을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상처를 싸매시는 하나님과 별을 세시는 하나님을 연결해야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상처를 별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프고 쓰라린 상처를 아름답고 아련하고 그리운 별로 만드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다 세지 못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다 세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처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을 못 하지만 하나님은 그 상처 하나하나의 이름을 아시고 그 이름대로 불러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아플 때 아프기만 하면 그 상처는 별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플 때 우리가 아프기 때문에 누군가의 관심과 돌봄과 애정을 듬뿍 받을 수 있다면 그 상처는 별이 됩니다. 나중에는 그 상처가 얼마나 아팠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서 심지어는 그때를 그리워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그때가 참 좋았어라고 추억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플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상처를 치료해 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돌봐주십니다. 하나님은 계속 우리의 상처에 관심을 가지고 돌봐주시고 괜찮냐고 물어봐 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우리 곁을 지켜 주시는 분입니다.

 

예화

어떤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임신하고 이제 해산할 날이 가까워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해산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아내의 고통에 함께 하고 싶어서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해산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저에게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의사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 오른손으로 윗입술을 잡고 왼손으로 아랫입술을 잡고 오른손은 최대한 위로 왼손은 최대한 아래로 끌어내리십시오.”

그러자 그 남편은 의사가 시키는 대로 오른손과 왼손을 이용해서 입을 최대한 위아래로 잡아당겼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 매우 아프고 괴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참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네. 이 정도구나.’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이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 이제 윗입술을 까뒤집어서 머리 뒤로 넘기세요.”

 

해산의 고통이 이렇게 극심한 것입니다. 남자들은 이런 얘기를 듣기만 하지 잘 모르죠. 단지 해산의 고통뿐만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은 후에 키우는 것도 참 힘이 드는 일입니다. 저는 해산의 고통은 함께 하지 못했지만 키우는 고통은 그래도 일정 부분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들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이렇게 힘든 데 또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고 또 아이를 낳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 낳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그것을 까먹는다고 합니다.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아이에게 사랑을 쏟아붓는 것이 좋아서 고통의 기억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상처 치유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결국 상처는 사라지고 별만 남게 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화 공동체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플 때 하나님도 아프실까요, 아프지 않으실까요? 예전에 다모라는 드라마에서 유명한 대사가 있었죠. “아프냐? 나도 아프다.” 우리가 아플 때 하나님도 아프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고 힘도 세시고 전능하시고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분이라서 우리의 작은 신음을 듣지 않으실 것 같습니까? 우리가 아플 때 하나님께서 나는 워낙 강력해서 안 아픈데라고 말씀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언제 기뻐합니까? 사람들은 보통 돈을 많이 벌면 기뻐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돈을 많이 벌어서 기쁩니다. 하나님도 기쁘시죠?”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에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아픈 사람들, 괴로운 사람들, 상처 입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모든 상처가 다 별이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화 가족 여러분, 어려움 중에 있습니까, 고통 중에 있습니까, 시련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상처를 싸매 주실 것입니다. 빨리 안 나아서 이게 낫고 있는지 아닌지 의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아파하고 계시고 그 상처를 돌봐 주고 계십니다. 상처를 별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믿으십시오. 나중에 여러분은 지금의 상처를 기억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그때 그렇게 아팠나?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기만 하는데.”

 

지금의 상처는 분명히 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상처를 별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쓰라린 상처를 아름다운 별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삶으로 체험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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